미국의 기조 변화는 일명 '달러 코인'으로 불리는 스테이블코인이 기축통화국으로 달러 패권 지위를 이어가려는 미국의 의지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달러 코인을 많이 발행할수록 달러와 미국 국채에 대한 수요가 많아져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다. 한국도 원화 주권을 지키기 위해 스테이블코인 관련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타국 화폐 위상 높이면 안 돼"…정부·의회·은행, '리브라'에 강한 반발
미국은 지난 2019년 당시 페이스북이 추진한 스테이블코인 '리브라' 발행을 강하게 저지한 바 있다. 당시 미국 정부는 다름 아닌 지난해 재선에 성공해 스테이블코인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끌고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6년 만에 입장을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리브라가 좌초된 가장 큰 이유는 달러가 아닌 여러 국가의 화폐로 이뤄진 '통화 바스켓'을 통해 스테이블코인의 가치를 유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달러 패권 강화를 전략적으로 도모하는 미국이 타국 통화의 위상을 높이는 건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엔 정부뿐만 아니라 의회도 리브라에 대해 날 선 비판을 쏟아냈다. 미국 상원 금융위원회는 지난 2019년 7월 '리브라 청문회'를 열고 "리브라는 신뢰 받을 자격이 없다"며 "이익을 추구하는 민간 프로젝트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국가기관도 아닌 빅테크 기업이 만든 '코인'이 기존 법정통화를 대체할 수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제롬 파월 의장도 당시 페이스북 측에 리브라 도입을 중단하라고 촉구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리브라 프로젝트를 총괄한 데이비드 마커스는 "리브라는 은행 계좌를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다"라며 "미국이 주도권을 잡지 않으면 다른 나라가 디지털 통화 시장을 선도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럼에도 비판이 계속되자 페이스북은 리브라를 공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발행 계획을 무기한 연기했다.
김병준 디스프레드 리서처는 "리브라는 미국 달러 패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정치적 우려와 금융 안정성·자금세탁 리스크 등의 문제로 강한 반발이 있었다"며 "특히 정부와 중앙은행의 조직적인 압박과 페이스북에 대한 불신으로 프로젝트가 무산됐다"고 말했다.
6년 만의 입장 대전환…달러·미 국채 수요 높일 수단으로 주목
6년이 흐른 지금, 미국의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입장은 정반대로 돌아섰다. 현재 전 세계 스테이블코인 거래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테더(USDT)와 USD코인(USDC) 모두 달러와 1:1로 가치를 연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22일 오후 3시 가상자산 데이터 제공 플랫폼 코인게코에서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시가총액은 2373억 7083만 달러(약 336조 7105억 원)로 USDT·USDC(2056억3111만달러)가 86.6%를 차지한다.
실제로 스테이블코인 USDT 발행사 테더는 달러 현금과 미국 국채를 준비금으로 확보한 뒤 코인을 찍어낸다. USDT 발행량이 늘어날수록 달러와 미 국채에 대한 수요가 자연스레 늘어나는 구조다. 이는 달러 패권을 유지·강화하려는 미국의 전략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김갑래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난 1월 발간한 보고서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때부터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 유지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며 "국제 지급결제 시스템 재편을 위해 미국 달러 기반의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한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했다"고 분석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트럼프 대통령 가족이 참여한 블록체인 프로젝트 '월드 리버티 파이낸셜(WLFI)'은 지난 3월 미국 달러에 연동된 스테이블코인 'USD1'을 발행한다고 밝혔다. USD1은 미국 단기 국채와 달러 예금 등을 준비금으로 마련할 계획이다.
의회 역시 관련 움직임을 보인다. 미국 의회는 지난 2월 '지니어스 액트'라는 이름의 스테이블코인 관련 법안을 발의하고,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준비금 전부를 현금과 미 국채, 은행 요구불예금으로 보유하도록 규정했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법안이 통과하면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는 준비금으로 미 국채를 선호할 가능성이 높다"며 "수익률이 높은 국채를 통해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도 지난 17일 "가상자산 업계가 여러 실패를 겪었지만, 의회가 스테이블코인 법안을 다시 검토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며 환영한다는 입장을 전했다.
김 리서처는 "스테이블코인의 영향력이 지난 2019년보다 커졌다"며 "달러 패권의 위협 요소가 아닌 디지털 금융 산업에서 달러의 지배력을 확대할 전략적 도구로 인식이 변했다"고 했다.
원화 주권 위협하는 美 스테이블코인 전략…"관련 규율 마련해야"

지난 1월 기준 주요국 스테이블코인 규제 현황./출처=자본시장연구원
우리나라도 미국의 '스테이블코인 패권 전략'에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앞으로 미국이 스테이블코인 발행량과 쓰임새를 확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김 리서처는 "유럽과 일본처럼 한국도 이젠 스테이블코인 관련 정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디지털 패권 경쟁에서 '원화'의 위상이 우려된다. 원화는 이미 국제무대에서 통용성이 낮고 외환규제도 강하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이 테더를 원화보다 더 신뢰하고, 실생활에서 쓰기 시작하면 통화 주권이 위축될 수 있다. 정부가 금리를 조절해도, 시장에 미치는 효과는 줄어들고, 외환시장의 안정성도 약화된다. 또 자본 유출이 쉬워지며 국가의 통화정책은 실효성을 잃게 된다.
김갑래 선임연구위원은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에서 대규모로 유통되고 지급수단으로 활발히 사용되면 원화 통화 주권이 약해질 수 있다"며 "원화 통화 주권을 지키고 이용자 보호 수준을 높이기 위해 스테이블코인 규제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chsn12@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