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8년 1월 박상기 당시 법무부 장관이 "거래소 폐쇄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이른바 '박상기의 난' 이후, 미봉책으로 생긴 규제가 가상자산 거래소와 은행 간 실명계좌 제휴다. 이후 계좌 제휴는 법제화된 사항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자 국회와 당국은 임시방편으로 기존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을 개정했다.
특금법 이후 가상자산 이용자보호법이 나오는 데도 3년이 걸렸다. '첫 업권법'인 만큼 가상자산 산업 전반에 대한 규정이 담길 것으로 예상됐지만 이용자보호법은 가상자산사업자에 대한 기존 규제를 강화하는 데 그쳤다. 가상자산 발행, 상장 등 정작 중요한 내용은 담기지 않은 임시방편이었다. '박상기의 난' 이후 아직도 '업권법'은 만들어지지 않은 셈이다.
이런 가운데 기존 가상자산뿐 아니라 스테이블코인의 영향력까지 거세지면서 규제환경의 셈법은 더 복잡해졌다.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히 새로운 시장이 아니라, 통화 주권까지 위협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더욱 빠른 대응이 필요하다. 이전과 같은 임시방편으로는 신산업은 물론 통화 주권도 지킬 수 없다는 위기의 목소리가 높다.
초유의 계엄사태로 예정에도 없던 '장미대선'이 치러지게 되면서 정치권은 또다시 가상자산 분야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선거철만 되면 '반짝 관심'이다.
이번에는 대선과 새 정부 출범 등을 이유로 또 한 번 제도 마련을 미뤄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스테이블코인 규제를 포함해 가상자산 '2단계 법안' 자체를 서두르는 게 이상적이지만, 사안의 시급성을 고려해 스테이블코인 법안을 별도로 추진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다른 나라는 다 하는데…스테이블코인 규제 마련 시급
우선 스테이블코인 규제를 더 이상 미뤄선 안된다는 데는 업계와 당국 모두 공감하고 있다. 주요국은 이미 스테이블코인 규제 마련에 모두 착수했다.
일본은 이미지난2023년 6월 자금결제법 개정으로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용했다. 유럽연합(EU)도 스테이블코인 규제가 포함된 가상자산 법안 '미카(MICA)'를 지난해부터 시행하고 있다.
미국과 홍콩은 별도 법안을 마련해 통과를 앞두고 있다. 홍콩은 스테이블코인 규제안이 지난해 12월 입법회에 회부됐으며 늦어도 올여름 통과될 예정이다. 미국에서도 지난 2월 스테이블코인 규제안 '지니어스 액트(GENIUS Act)'가 상원에서 발의됐다.
블록체인 리서치 업체 포필러스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CBDC(중앙은행디지털화폐) 대신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공식적인 지지를 표명했다.이러한 글로벌 환경을 고려할 때 국내 스테이블코인 규제 마련을 위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특히 최근에는 원화 연동 스테이블코인 발행의 필요성도 대두되고 있어,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위해서라도 규제가 시급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김치프리미엄' 등 국내 가상자산 시장의 구조적 비효율을 해결하고, 통화 주권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고려되는 추세다. 이때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나오려면 발행 요건 등을 규정한 규제 체계가 필요하다.
별도 법안 vs 2단계 입법에 포함…추가 논의 필요
우선 최근에는 스테이블코인을 '별도 법안'으로 규율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지난달 국민의힘이 금융위원회 및 금융감독원, 주요 가상자산 거래소와 함께 연 민당정 간담회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을 2단계 법안이 아닌, 별도 법안으로 규제하는 방안이 언급됐다.
앞서 당정은 스테이블코인 규율 체계를 '가상자산 2단계 법안'에 담겠다는 기조를 유지해왔다. 지난해 7월부터 시행된 가상자산 이용자보호법은 투자자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규제만 다룬 '1단계 법안'이다. 스테이블코인, 가상자산발행(ICO) 및 유통 등은 2단계 입법으로 다룰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난달 간담회에서는 2단계 법안에 모든 것을 담기보다, 제도화가 시급한 사안은 따로 제도를 마련하는 방안이 논의됐다. '제도화가 시급한 사안'의 대표적인 예가 스테이블코인이다.달러 스테이블코인을 비롯해 해외에서 발행된 다른 법정화폐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국내에서 어떻게 규제할 것인지도 복잡하기 때문에 별도의 규제 체계가 더욱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감원 관계자는 "연초에 가상자산위원회에서도 스테이블코인에 관련해 논의한 바 있고, 이후 지속적으로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며 "국회 의원실에서 자체적으로 입법안을 마련 중인 곳도 있고, 정부도 정부 안을 나름대로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서병윤 DSRV 미래금융연구소장은 "가상자산 2단계 법안의 주요 쟁점은 스테이블코인이 아니라 상장심의위원회 등 가상자산 상장과 관련한 이슈가 될 것 같다"며 "이외에도 쟁점이 많다 보니 2단계 더 법안은 늦어질 수 있는데, 스테이블코인은 속도감 있게 규제해야 하는 이슈라 별도 법안으로 빼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고 설명했다.
천창민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도 "2단계 법안은 상당히 광범위하다.그만큼 입법 과정에서 진득한 논의를 거쳐야해 국회에서 언제 채택될지 모른다"며 "여기에 스테이블코인까지 넣으면 더 복잡해진다. 스테이블코인을 별도로 빼는 '투트랙' 전략이 필요하다"고 했다.
포필러스 측도 "스테이블코인은 지급 결제 수단과 투자 자산의 성격을 모두 가지며, 이를 포섭할 수 있는 적절한 현행 법의 틀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독자적인 규제 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반면 일각에서는 기존 계획대로 스테이블코인 규제를 2단계 법안에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도 여전하다.
황석진 동국대학교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스테이블코인 규제가 별도로 뺄 만큼 양이 방대한 것은 아니다"라며 "결국엔 스테이블코인도 민간이 주도해 발행하는 코인이기 때문에 가상자산 발행 규제로 규율할 수 있다. 민간이 발행하는 코인 중 '가치 안정용' 가상자산으로 분류하면 된다"고 말했다.
'별도 법안'이 글로벌 트렌드라는 의견에 대해서도 "일본은 자금결제법 안에서 스테이블코인을 규율했고, 유럽도 '미카' 법에 스테이블코인 규제를 포함했다"면서 별도 법안만이 글로벌 정합성에 부합하는 건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회도 스테이블코인을 2단계 법안에 추진하는 방향을 고수하고 있다. 최근 민병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준비 중인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안에는 스테이블코인 인가제에 대한 내용이 포함됐다.
민 의원실은 가상자산 2단계 법안으로 준비 중인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안에 스테이블코인을 '자산 연동형 디지털자산'으로 규정하고, 금융위의 인가를 받은 경우에만 발행이 가능하도록 인가제를 도입할 것으로 알려졌다.
hyun1@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