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을 기준으로 보면 1세대는 실물증권, 2세대는 전자증권, 3세대는 토큰화 증권입니다. 토큰화는 금융의 다음 세대(Next Generation)입니다." 세계 금융의 수도 뉴욕이 이번에는 '토큰화의 수도'로 변신하고 있다.
토큰화 국채 시장을 주도하는 블랙록과 머니마켓펀드(MMF)를 토큰화한 프랭클린 템플턴은 물론, 토큰화 주식 플랫폼 온도파이낸스, 디지털 증권 발행 플랫폼 시큐리타이즈, 기관용 RWA 플랫폼 플룸네트워크 등 주요 플레이어들이 뉴욕에 집결해 있다.
월가는 자산 토큰화를 금융의 '다음 세대'로 보고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전통 금융과 가상자산 기업이 협업하는 새로운 생태계가 빠르게 형성되고 있다. 뉴욕에서 뉴스1과 만난 크리스토퍼 퍼킨스(Christopher Perkins) 프랭클린 크립토 대표는 "월가는 토큰화를 당연히 따라야 할 흐름으로 인식하고 있다"며 "대형 금융사와 협업하고 싶은 스타트업들이 자연스럽게 뉴욕으로 모이면서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프랭클린 크립토는 미국 대표 자산운용사 프랭클린 템플턴의 디지털자산 사업부다. 프랭클린 템플턴은 최근 가상자산 투자사 '250 디지털'을 인수하며 토큰화 사업 확대에 나섰다. 업계에서는 뉴욕이 토큰화 산업의 중심지로 부상한 배경으로 월가의 적극적인 참여를 꼽는다. 전통 금융사들이 토큰화를 미래 성장동력으로 낙점하면서 관련 스타트업과 인재들이 함께 모여드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됐다는 설명이다. "가상자산은 침체인데 토큰화는 3배 성장" 월가가 토큰화에 주목하는 이유는 시장 성장세가 이미 숫자로 입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물자산토큰화(RWA) 데이터 플랫폼 rwa.xyz에 따르면 지난해 6월 110억달러(약 16조8000억원) 수준이던 토큰화 자산 규모는 올해 5월 중순 328억달러(약 50조원)로 증가했다. 1년 만에 약 3배 성장한 수치다.
같은 기간 가상자산 시장은 가격 조정과 거래 감소로 침체를 겪었지만 토큰화 시장은 오히려 꾸준히 몸집을 키웠다. 퍼킨스 대표는 "4년 전만 해도 월가 기관들이 크립토를 건드리는 것을 위험하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크립토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며 "금융기관들의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프랭클린 템플턴과 블랙록 같은 초대형 금융사들이 있다. 프랭클린 템플턴은 토큰화 MMF 상품 '벤지(BENJI)'를 출시하며 시장 개척에 나섰고, 블랙록은 토큰화 국채 펀드 '비들(BUIDL)'을 선보이며 기관 자금을 끌어들이고 있다. 특히 벤지는 지난해 6월 약 8억달러 규모에서 올해 6월 초 25억달러 규모로 성장했다. 전체 토큰화 시장과 비슷하게 1년 만에 3배 이상 커진 셈이다.
경쟁보다 협업…월가와 크립토의 동맹 흥미로운 점은 토큰화 시장이 전통 금융과 가상자산 업계의 경쟁 구도가 아니라 협업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블랙록의 토큰화 상품은 디지털 증권 전문기업 시큐리타이즈가 발행과 인프라 구축을 지원하고 있다. 향후 나스닥이 토큰화 주식 거래를 본격화할 경우 가상자산 거래소 크라켄이 유통 파트너 역할을 맡는 방안도 추진되고 있다. 온도파이낸스, 플룸네트워크 등도 전통 금융기관과의 협업을 핵심 전략으로 삼고 있다. 테디 폰프리냐(Teddy Pornprinya) 플룸네트워크 공동창업자는 "모두 같은 도시에 있으니 전략을 함께 논의하고 사업을 추진하기가 훨씬 쉽다"며 "기관 중심의 토큰화 시장이 성장할수록 뉴욕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뉴욕에서는 월가 금융사와 블록체인 기업, 법률회사, 투자은행, 벤처캐피탈이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며 토큰화 산업을 키우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 실리콘밸리가 인터넷 혁신의 중심지였다면 지금 뉴욕은 금융 토큰화 혁신의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인은 못 쓰는데도 뉴욕에 몰린 이유 현재 시장을 이끄는 상당수 토큰화 상품이 미국인이 아닌 해외 사용자를 대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대표적으로 로빈후드는 유럽 투자자를 대상으로 토큰화 주식 거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온도파이낸스 역시 미국 외 투자자를 주요 고객으로 두고 있다.미국 내 디지털자산 관련 규제가 아직 완전히 정비되지 않아서다. 그럼에도 기업들이 뉴욕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규제 명확성이 조만간 확보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 의회에서는 디지털자산 시장구조법(CLARITY Act·클래리티법)이 논의되고 있다. 해당 법안이 통과될 경우 토큰화 자산에 대한 법적 지위와 감독 체계가 보다 명확해질 전망이다. 니콜라 화이트(Nicola White) 로빈후드 가상자산 부사장은 "규제 명확성이 확보되면 미국 사용자를 대상으로 하는 토큰화 상품도 크게 늘어날 것"이라며 "이미 뉴욕에는 관련 인력과 기업들이 충분히 모여 있다"고 말했다. 미 증권거래위원회(SEC) 역시 실제 주식을 1대1로 담보하는 토큰화 주식 거래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혁신 면제(Innovation Exemption)'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화이트 부사장은 "로빈후드는 규제 준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동안 상대적으로 규제가 명확한 유럽에서 서비스를 운영해왔다"며 "SEC가 토큰화 주식 제도화를 검토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업계에서는 토큰화가 단순히 새로운 투자 상품이 아니라 금융 인프라 자체를 바꾸는 흐름이라고 보고 있다.실물 증권에서 전자 증권으로 넘어갔던 변화가 다시 한 번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퍼킨스 대표는 "토큰화는 금융의 다음 세대"라며 "월가는 이미 그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