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자산 거래소가 해커들의 주요 표적이 되는 것은 한 번의 공격으로 수조 원대 자산을 탈취할 수 있는 구조 때문이다. 거래소에 고객 가상자산이 집중돼 있는 데다 자산을 옮기는 개인 키나 거래 승인 권한을 장악하면 대규모 자산을 외부 지갑으로 빼돌릴 수 있다. 은행 송금과 달리 블록체인에서 확정된 거래는 원칙적으로 취소할 수 없다는 점도 공격 유인을 높이는 요인이다.
세계 최대 가상자산 거래소 바이낸스의 대규모 해킹을 계기로 거래소의 자산 보관·이전 구조와 보안 취약점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단순히 콜드월렛 보관 비중을 높이는 데 그치지 않고 개인 키 관리와 출금 승인·서명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3일 가상자산 업계에 따르면 바이낸스는 최근 약 63억 달러(약 8조 4000억 원) 규모의 해킹 피해를 입은 뒤 자산 보충과 출금 서비스 복구를 진행하고 있다.
거래소가 해커들의 표적이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고객의 가상자산 현물이 한곳에 집중돼 있다는 점이다. 여러 고객의 자산을 관리하는 지갑의 통제권을 빼앗으면 개별 고객 계정을 일일이 공격하지 않고도 막대한 자산을 탈취할 수 있다.
황석진 동국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가상자산 거래소가 직접 자산을 보관한다는 점에서 은행·증권·보험사와 다르다"며 "더 엄격한 보안 기준과 점검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은행은 송금 과정서 차단 가능…코인은 지갑으로 직접 이전 해커가 탈취한 자산을 빼돌리는 과정에서도 전통 금융회사와 가상자산 거래소는 차이가 있다.
은행에서 돈을 훔치려면 계좌 접근권한을 확보한 뒤 다른 계좌로 송금하거나 현금으로 인출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금융회사의 이상거래 탐지와 송금 제한, 계좌 동결 등으로 자금 이동을 차단할 기회가 있다.
반면 가상자산은 개인 키를 탈취하거나 거래 승인 절차를 장악하면 해커가 관리하는 지갑으로 직접 전송할 수 있다. 유효한 서명으로 블록체인에서 거래가 확정되면 원칙적으로 이를 일방적으로 취소할 수 있는 중앙 운영자도 없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2021년 발표한 자료에서 가상자산 절도가 전통 금융기관을 상대로 한 절도보다 상대적으로 덜 복잡하다고 분석했다.
은행 자금을 훔쳐 세탁하려면 송금과 인출을 도울 범죄 조직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금융회사에 적발되거나 공범이 배신할 위험도 있다. 반면 가상자산은 탈취한 자산을 해커가 통제하는 지갑으로 직접 이전할 수 있어 중간 단계를 줄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2016년 발생한 방글라데시 중앙은행 해킹은 이러한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다. 북한 해킹 조직 라자루스는 방글라데시 중앙은행에서 약 9억 5100만 달러를 빼돌리려 했지만 실제 탈취액은 약 8000만 달러에 그쳤다. 국제 송금 과정에서 일부 거래가 차단되면서 추가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가상자산 역시 거래 기록이 블록체인에 남아 이동 경로를 추적할 수 있지만, 추적이 곧 회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탈취 자산이 중앙화 거래소로 유입되면 출금을 제한할 수 있고, 일부 스테이블코인은 발행사가 특정 주소의 자산 이동을 동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다른 지갑으로 옮겨진 자산을 되찾으려면 거래소와 발행사, 수사기관 등의 공조가 필요하다.
해킹 피해 76%가 '인프라 공격'…자산 움직이는 열쇠 노린다 최근 해킹 공격은 거래소의 프로그램 오류를 찾아내는 데서 나아가 대규모 자산을 움직일 수 있는 개인 키와 관리자 권한, 거래 승인 체계를 장악하는 방향으로 고도화하고 있다.
블록체인 분석업체 TRM랩스가 지난 1월 발표한 '2026 가상자산 범죄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개인 키와 지갑 인프라, 관리자 권한 등을 겨냥한 공격으로 발생한 피해액은 약 22억 달러로 전체 가상자산 해킹 피해액의 76%를 차지했다.
개별 코인이나 프로그램의 취약점을 공략하기보다 자산을 관리하고 이전할 수 있는 핵심 권한을 탈취하는 공격이 대규모 피해로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피해가 소수의 대형 사건에 집중되는 현상도 나타난다. 블록체인 분석업체 체이널리시스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분석에 따르면 상위 3건의 해킹 사고가 가상자산 서비스 전체 해킹 피해액의 69%를 차지했다.
특히 중앙화 거래소는 다수 고객의 자산을 관리하는 만큼 지갑 운영체계나 서명 권한이 침해될 경우 피해 규모가 급격히 커질 수 있다.
황 교수는 "거래소는 디지털 자산을 직접 보유하고 있어 공격이 돈이 되기 때문에 해커들의 표적이 된다"며 "탈취한 자산을 현금으로 바꿀 수 있고 테더 같은 자산은 현금처럼 사용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콜드월렛만으론 한계…출금 승인·서명 체계가 핵심 전문가들은 가상자산 거래소의 보안을 강화하려면 자산 보관 장소뿐 아니라 실제 자산을 이동시키는 과정의 통제 체계를 점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국내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은 거래소가 고객 가상자산 가치의 80% 이상을 인터넷과 분리된 콜드월렛에 보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온라인 공격에 노출되는 자산을 줄이기 위한 조치지만 콜드월렛에 보관된 자산도 외부로 옮기는 과정에서 공격받을 수 있다.
지난해 2월 약 15억 달러 규모의 피해가 발생한 바이비트 해킹이 대표적이다. 당시 공격자는 지갑 관련 서비스에 악성 코드를 심어 거래 승인 화면에 표시되는 내용과 실제 서명 대상 거래를 다르게 만들었다. 승인자들이 정상적인 거래로 인식하고 서명하도록 유도해 콜드월렛의 자산을 탈취했다.
자산을 인터넷과 분리해 보관하더라도 거래 승인과 서명 과정이 침해되면 대규모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황 교수는 "콜드월렛 비중 확대도 필요하지만 근본적인 해킹 예방책은 아니다"라며 "지난해 업비트 해킹 이후 콜드월렛 비중을 99% 수준까지 높였다는 점에서 같은 대책을 반복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바이낸스 사고에서도 내부 시스템과 출금 승인·서명 체계가 침해됐을 가능성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며 "단순한 보관 비중 확대보다 관리자 권한 통제, 서명 체계 분리, 실시간 이상 출금 차단 등 실질적인 보안 검증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