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 개인정보 이슈에 정부와 ‘대립각’...한미 이슈로 확전

IT/과학

이데일리,

2025년 12월 29일, 오전 07:17

[이데일리 윤정훈 기자] 쿠팡이 3370만명에 달하는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위기 앞에서 고개를 숙이기보다, ‘셀프 조사 발표’와 ‘미국발 통상 압박’이라는 초강수를 택했다. 미국 증시 상장사로서 천문학적 규모의 대미 집단소송 리스크를 방어하려는 고도로 계산된 대응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올해 1월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비공개 리셉션장에서 김범석(좌) 쿠팡Inc 의장이 도널드 존 트럼프 주니어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미국 증시 집단소송 의식한 쿠팡의 ‘셀프 발표’

쿠팡이 정부의 공식 조사 결과 발표에 앞서 지난 25일 자체 조사 결과를 먼저 공개한 배경에는, 미국 증시에서의 법적 리스크를 선제적으로 낮추려는 목적이 깔려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28일 김범석 쿠팡 Inc 의장은 사과문을 내고 “쿠팡은 최근 정부와의 협력을 통해 유출된 고객 정보 100%를 모두 회수 완료했다”며 “유출자의 컴퓨터에 저장돼 있던 고객 정보가 3000건으로 제한돼 있었음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쿠팡은 유출 규모가 3370만건이 아니라 3000건에 그친다는 점을 재차 강조한 셈이다.

업계에서는 이번 대응이 미국 내 집단소송 가능성을 의식한 조치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실제로 지난 18일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 연방법원에는 주주 조셉 베리가 김범석 의장을 상대로 주주 집단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증권법상 중대한 허위 공시는 막대한 배상 책임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쿠팡이 이번 사안을 ‘시스템적 결함’이 아닌 ‘개인의 일탈’로 규정하고, 유출 규모 또한 3370만건이 아닌 3000건으로 축소하는 방향으로 방어 논리를 구축하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다.

동시에 쿠팡은 이번 개인정보 유출 사안을 ‘미국 기업 차별’ 프레임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한국 정부의 대응을 ‘과도한 규제’로 규정하며 한미 통상 이슈로 비화시키는 전략을 취한다는 관측이다. 미국 하원 법사위 소속 대럴 아이사 공화당 의원이 23일(현지시간) ‘데일리 콜러’ 기고에서 한국 정부가 미국 기업을 차별·공격한다며 쿠팡을 사례로 언급한 것이 대표적이다. 트럼프 행정부 1기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로버트 오브라이언도 같은 날 X에 “한국이 미국 기술 기업들을 겨냥하며 트럼프의 노력을 훼손한다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될 것”이라고 적어 쿠팡을 거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미 무역대표부(USTR)가 지난 18일로 예정됐던 한미 FTA 공동위원회 첫 공식 회의를 취소했고, 쿠팡에 대한 규제가 부당하다고 보며 ‘무역법 301조’에 따른 관세 보복 가능성까지 거론하며 한국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처럼 미국 정관계를 통한 전방위 ‘지원 사격’이 이어지는 배경을 두고, 김 의장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작동한 결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하버드 출신 미국 시민권자인 김 의장이 올해 초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 공식 초청받아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 등 트럼프 진영 핵심 인사들과 교류하며 ‘미국 기업 쿠팡’의 입지를 다져왔다는 설명이다.

쿠팡 내부에서도 미국 정부를 겨냥한 대외 메시지가 강화되는 모습이다. 로버트 포터 쿠팡 글로벌 대외협력 최고책임자는 이달 초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무역협회 포럼에 참석해 “(한미 공동 팩트시트에는) 망 이용 대가나 온라인 플랫폼 규제에 관한 구체적인 문구들이 담겨 있는데, 이는 한국 정부와 국회가 추진하겠다고 위협해 온 것”이라며 “(한미 합의는) 미국 기업과 미국의 이익이 여러 시장에서 직면하고 있는 미묘한 특정 이슈, 특정 위협, 그리고 특정 장벽들에 대해 양자 간 협정이 얼마나 세부적으로 파고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데일리 김정훈 기자]
◇셀프 조사’ 쿠팡, 정부 조사와 정면충돌…온플법 논의에도 불똥

이번 사태의 핵심은 쿠팡의 ‘셀프 조사’ 발표가 한국 정부의 조사·수사 과정과 정면으로 충돌했다는 점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고위 관계자는 “민관 합동조사 과정에서 정부가 한 일은 자료 제출 요청과 확인 절차였다”며 “정부 전체가 쿠팡과 협의하며 긴밀히 커뮤니케이션한 것처럼 확대 해석해 언론에 내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국회 정무위원회는 온라인플랫폼공정화법(온플법) 제정 추진에 나서고 있다. 다만 미국 측이 온플법에 제동을 걸면서 논의 시점이 차일피일 늦어지는 분위기다.

시장에서는 쿠팡의 강고한 플랫폼 ‘락인’ 효과와 이에 기반한 한국 패싱에 대해, 시장지배적 사업자로서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규제 강화가 자칫 국내 플랫폼 업계 전반에 부담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쿠팡에는 행정 집행력이 충분히 미치지 못한 채, 결과적으로 국내 기업만 옥죄는 법·제도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성엽 고려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개인정보 유출 사건에 대해 매출의 10%까지 과징금을 매기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만큼 신중해야 한다”며 “팩트에 기반해 조사한 뒤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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