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장은 현재 진단 보조 소프트웨어의 싸움이 아닌 데이터와 인허가, 유통망을 한데 묶은 플랫폼 전쟁으로 바뀌고 있다. 특히 지난해 나스닥 상장 이후 한 해도 채 안돼 시가총액 136억달러(20조원)에 이르는 템퍼스AI(나스닥 TEM, 템퍼스)가 특허 장벽과 인수합병(M&A)을 통해 시장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템퍼스AI는 미국 종양 전문의의 50% 이상, 상위 20개 제약사의 95%와 협업하고 있다.
루닛(328130), 뉴로핏(380550), 제이엘케이(322510)와 같은 국내 의료AI 기업들도 미국 진출을 전략의 중심에 두고 공격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루닛(328130)은 지난해 3720만달러(542억원)의 매출로 성장률 116%를 기록했다. 하지만 규모에서는 템퍼스의 18배 이상 뒤져 있다.
팜이데일리는 미국 진출을 노리는 루닛(328130)과 뉴로핏(380550), 제이엘케이(322510) 등의 전략과 템퍼스의 경쟁력을 비교해봤다.
서범석 루닛 대표 (사진=루닛)
◇ 템퍼스AI, 데이터·인허가·M&A 3종세트로 시장 잠식
템퍼스는 차세대 염기서열 분석(NGS) 기술을 통해 정밀의료 혁신을 주도해왔다. 템퍼스의 강점으로 '폐쇄 루프' 구조가 꼽힌다. 유전체 검사 수익(매출의 65%)이 늘수록 데이터가 쌓이고 이 데이터를 제약사에 공급하면서 별도 수익(매출의 35%)을 창출한다.
진단 건수가 늘수록 데이터가 쌓이고 데이터가 쌓일수록 제약사·병원 락인효과(소비자가 특정 제품·서비스에 익숙해지거나 전환비용 때문에 다른 대안으로 쉽게 바꾸지 못하는 현상)도 커지고 있다.
템퍼스가 지난해 매출 6억9340만달러(1조원)에서 올해 목표치를 12억4000만달러(1조8000억원)로 전망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으로 풀이된다. 템퍼스는 구글 클라우드와의 계약을 연계한 전환사채까지 공시했으며 원금이 사용량에 따라 줄어드는 구조로 설계했다. 단순 고객이 아니라 클라우드와 자본이 연결된 형태인 셈이다.
템퍼스는 M&A도 속도를 내고 있다. 템퍼스는 지난 2월 유전성 암 검사 강자인 엠브리 제네틱스(Ambry Genetics)를 6억달러(8700억원)에 인수했다. 템퍼스는 지난 8월 디지털 병리 AI 기업 페이지(Paige)를 8125만달러(1200억원)에 인수했다. 이를 통해 템퍼스는 700만장의 디지털 병리 슬라이드와 임상·분자 데이터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M&A가 제품 라인업 확대를 넘어 학습 데이터와 고객 채널을 한꺼번에 사오는 방식으로 진화한 셈이다. 2022년 영상AI 기업 아틀라스(Arterys) 인수를 통해 심장·종양 영상까지 확보한 템퍼스는 이제 '유전체→영상→병리→데이터'까지 모든 영역의 제품을 보유한 정밀의료 데이터 OS로 거듭났다.
템퍼스의 특허 장벽도 높아지고 있다. 루닛의 미국 파트너인 가던트 헬스가 지난해 액체생검 특허 침해로 템퍼스에 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템퍼스는 지난 3월 34건의 특허를 동원한 역소송으로 맞대응했다.
템퍼스는 △82건의 미국 특허 및 허용된 출원 △136건의 출원 중인 특허 △25건의 해외 특허, 20건의 라이선스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주요 특허 영역은 △플랫폼 기술(데이터 처리, 사용자 인터페이스) △유전체학(암 검출, 액체생검, NGS 기반 변이 분석) △AI 알고리즘(종양학·심장학 진단, 디지털 병리학)으로 구분된다.
루닛 관계자는 "아직 파트너 소송에 의한 큰 영향은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며 "향후 어떻게 될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빈준길 뉴로핏 대표 (사진=뉴로핏)
◇ 루닛·뉴로핏, '우회로' 전략으로 미국 병원 공략
루닛은 템퍼스와 정면대결 대신 가장 큰 시장 중 하나인 미국 유방검진에서 유통망을 확보했다. 루닛은 뉴질랜드 기반 볼파라를 인수하며 미국에서 시행되는 유방 엑스레이(X-ray)의 42%를 커버한다.
루닛의 교차판매 전략도 주목할 만하다. 루닛은 볼파라의 강점인 미국 시장을 활용해 루닛 인사이트를 판매하고 동시에 루닛의 글로벌 파트너십으로 볼파라를 유럽으로 확대한다. 볼파라는 올해 상반기 248억원의 매출과 3억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같은기간 볼파라는 영업흑자도 달성했다.
루닛 측은 핵심 차별점이 의료영상 AI 성능이 아니라 현지 채널과 데이터, 제품 묶음으로 미국 병원 워크플로우 안에 들어가는 실행력이라고 설명했다.
루닛 관계자는 "중요한 점은 판독 대체가 아니라 먼저 알려서 시간을 줄이는 트리아지 툴이라는 것"이라며 "미국 병원은 의사를 바꾸는 제품보다 일의 순서를 바꿔주는 제품을 먼저 산다. 그 교집합이 가장 크다"고 강조했다.
뉴로핏은 뇌 자기공명영상(MRI) 기반 정량 분석을 무기로 삼는다. 뉴로핏은 미국 식품의약국(FDA) 510(k) 승인 이력이 있다. 뉴로핏은 지난해 업데이트 버전도 FDA 문서로 확인된다. 이 영역은 영상 판독 보조보다 연구·임상시험, 만성질환(치매/다발성경화증) 관리와 맞닿아 있다.
템퍼스가 병리·유전체 데이터를 끌어모으는 것처럼 뉴로핏은 신경계 질환에서 정량 데이터 파이프라인을 만든다는 그림이 가능하다. 뉴로핏은 미국 시장 공략을 위해 지난 4월 보스턴 캠브리지 이노베이션 센터(CIC)에 미국 사무소를 개설했다. 뉴로핏은 이달 조쉬 코헨을 미주 사업 총괄로 영입했다. 조쉬 코헨은 뉴로핏의 핵심 경쟁사 코텍스AI(Cortechs.ai)의 전 최고개발책임자(CCO) 출신으로 전해진다.
전문가들은 결국 미국에서 전문의에게 워크플로우 개선 등 확실한 베네핏(장점)을 줄 수 있어야 영업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관전 포인트는 국내 기업이 미국에서 인허가가 일회성에 그칠지 아니면 채널·급여·데이터·특허를 묶어 반복 가능한 확장 모델을 만들지가 될 전망이다. 미국 병원은 제품을 성능보다 업무 흐름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뉴로핏이 트리아지로 들어가고 루닛이 검진 채널로 들어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 상황에 정통한 AI의료업계 관계자는 "템퍼스는 파운데이션 모델을 내세우며 병리 슬라이드를 추가 확보했다"며 "국내 기업은 전 분야를 다 먹으려 하기보다 한 질환군에서 정량화 가능한 데이터 파이프라인을 먼저 만드는 게 현실적"이라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