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헬스케어 시장 공략이 '제2막'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MS)가 클라우드와 인프라를 중심으로 의료 시장의 문을 두드렸다면, 최근 오픈AI와 앤트로픽은 생성형 AI를 활용한 '진료 보조'와 '데이터 통합'이라는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영역으로 전선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오픈AI의 스타트업 '토치(Torch)' 인수와 앤트로픽의 '클로드 포 헬스케어(Claude for Healthcare)' 출시는 AI가 실험실을 벗어나 실제 진료실과 보험 청구 시스템 깊숙이 침투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본지는 글로벌 빅테크의 헬스케어 진출 현황을 긴급 점검하고, 한국 의료 AI 생태계에 던지는 시사점을 분석했다.
(사진=제미나이)
◇오픈AI·앤트로픽, '데이터 통합'과 '행정 자동화'로 승부수
오픈AI가 지난 12일(현지시간) 약 6000만 달러(한화 약 800억 원)에 인수한 '토치'는 의료 데이터의 파편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 특화된 기업이다. 일리야 아비조프 토치 CEO를 비롯한 창업 멤버들은 미국의 테크 기반 1차 진료 체인인 '포워드 헬스(Forward Health)'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환자가 병원을 옮길 때마다 진료 기록이 단절되는 문제에 주목했다.
토치의 핵심 기술은 '통합 의료 메모리(Integrated Medical Memory)'다. 여러 병원과 웨어러블 기기에 흩어진 환자의 건강 지표를 표준화해 AI가 맥락(Context)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업계 관계자는 "오픈AI가 챗GPT를 단순한 질의응답 도구가 아닌, 환자의 생애 전주기를 관리하는 '퍼스널 닥터'로 진화시키려는 전략"이라며 "이번 인수로 챗GPT의 의료 상담 깊이가 획기적으로 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면, 앤트로픽은 철저히 '의료 행정의 효율화'를 파고들었다. 이번에 공개된 '클로드 포 헬스케어'는 미국 의료 시스템의 고질병인 복잡한 보험 청구와 사전 승인 절차를 타깃으로 했다. 미국 메디케어·메디케이드 서비스센터(CMS) 데이터베이스 및 국제질병분류(ICD-10) 코드와 직접 연동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앤트로픽 측은 "의료진이 보험사 승인을 받기 위해 수작업으로 서류를 검토하던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한국의 심사평가원 시스템과 유사한 규제 데이터를 AI가 직접 학습해, 삭감 우려가 있는 청구를 사전에 보정하거나 이의 신청 근거를 자동으로 생성해준다는 의미다. 보안에 민감한 의료계를 의식해 HIPAA(의료정보 보호법) 준수 환경을 기본으로 제공하는 점도 의료기관들의 진입 장벽을 낮춘 요인으로 꼽힌다.
◇구글과 MS, '진단 보조'와 '워크플로우' 장악전
후발주자들의 추격이 거세지만, 기존 강자인 구글과 MS의 입지는 여전히 견고하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일찌감치 AI 음성 인식 기업 '뉘앙스(Nuance)'를 197억 달러에 인수하며 진료실의 '귀'를 장악했다. MS의 '닥스 코파일럿(DAX Copilot)'은 의사와 환자의 대화를 실시간으로 듣고, 자동으로 구조화된 임상 노트(Clinical Note)를 작성해 전자의무기록(EHR)에 입력한다.
최근에는 이를 '드래곤 코파일럿(Dragon Copilot)'으로 통합하며 에픽(Epic) 등 주요 EHR 시스템과의 연동성을 더욱 강화했다. MS 측 데이터에 따르면, 이 시스템을 도입한 간호사와 의사들은 하루 평균 2시간의 행정 업무 시간을 절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MS가 '의료진의 번아웃 해결'이라는 실질적인 워크플로우 개선에 집중하고 있다면, 구글은 '진단 및 검색 능력' 고도화에 방점을 찍고 있다.
구글은 의료 특화 LLM인 '메드-제미나이(Med-Gemini)'를 통해 엑스레이, 병리 슬라이드 등 복합적인 의료 데이터를 분석하는 데 주력한다. 미국 의사 면허 시험(MedQA)에서 91.1%의 정답률을 기록할 정도로 진단 정확도 면에서는 앞서 있다는 평가다. 다만, 최근 구글 검색의 'AI 오버뷰' 기능이 부정확한 건강 정보를 노출해 논란이 된 점은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았다. 구글은 신뢰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검색 결과 노출을 조정하는 등 숨 고르기에 들어간 상태다.
'한국형 의료 AI', 데이터 파편화 해결이 관건
글로벌 빅테크의 헬스케어 전쟁은 한국 기업과 정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은 전 국민 건강보험 데이터를 보유해 데이터의 양과 질 면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췄지만, 데이터 활용과 플랫폼 간 연동성(Interoperability) 측면에서는 여전히 규제의 벽이 높다.
국내 한 대학병원 의료정보센터장은 "오픈AI의 토치 인수 사례처럼, 결국 승패는 파편화된 데이터를 누가 하나의 맥락으로 엮어내느냐에 달렸다"며 "한국 기업들도 단순히 영상 판독이나 진단 보조 기능을 넘어, 병원 내 행정 업무를 자동화하거나 환자의 데이터를 통합 관리해주는 '플랫폼형 AI'로의 진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부 차원에서도 마이데이터 사업 등 의료 데이터 표준화 정책을 가속화해, 루닛이나 뷰노 같은 국내 유망 기업들이 글로벌 빅테크와 경쟁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진료실의 풍경을 바꾸고 있는 AI 기술이 한국 의료 현장에는 어떤 모습으로 안착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