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게임 동호회(길드) '오토핀사운드'를 운영하는 김준형 씨가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종로인명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2026.2.20 © 뉴스1 이기범 기자
"쭉 내려와서 1시 방향."
우두머리(보스)를 향해 가는 시공간의 문(포털)을 따라 혼령사와 원소술사, 야만용사, 성기사 등 4명으로 이뤄진 파티가 차례로 이동한다. 곧이어 등장하는 악마들의 수괴. 게임 컨트롤러 위로 바삐 움직이는 손놀림에 따라 번쩍이는 마법과 화려한 검무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치열한 공방 끝에 우두머리는 제압되고, '나락 77단계 완료'라는 메시지가 화면에 뜬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했어요."
"좋은 템(보상품)은 안 나왔네요."
바쁘게 아이템 줍는 소리. 악마 소굴을 헤치고 나온 서로를 격려하는 목소리. '디아블로4'를 즐기는 여느 게임 동호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그러나 이들이 게임을 즐기는 방식은 남들과 조금 다르다. 이들 앞에는 게임 화면을 보여주는 모니터가 없다.
지난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종로인명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시각장애인 게임 동호회(길드) '오토핀사운드'를 만났다. 동호회는 김준형 씨(닉네임 오토핀사운드, 34·남), 박동희 씨(닉네임 힐링, 40·남), 황인상 씨(닉네임 블루스, 32·남), 서예림 씨(닉네임 아이린, 31·여) 등 4명을 주축으로 한다. 이들은 유튜브 실시간 방송을 하기도 한다.
동호회 회장(길드장)을 맡고 있는 김준형 씨는 지난해 9월부터 디아블로4를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게임이자 시각장애인도 즐길 수 있는 '접근성 기능'을 제공하는 몇 안 되는 게임이기 때문이었다.
디아블로4는 미로 같은 던전을 오가면서 보스 몬스터를 잡고, 아이템을 얻어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액션 롤플레잉 게임(RPG)이다. 빠르게 던전을 돌파해 원하는 아이템을 수급하려면 '길 찾기' 능력이 필수적이다. '나락'이라 불리는 일부 던전에서는 시간제한마저 있다.
'시각'이 제한된 이들의 게임 플레이를 뒷받침하는 건 '청각'이다.문자를 음성으로 변환해주는 TTS(Text to Speech·텍스트 음성 변환)가 쉴 새 없이 스피커와 헤드셋 진동판을 울린다. 화면을 읽어주는 '스크린 리더'(음성 안내) 기능이 '접근성' 구현의 핵심이다. 아이템부터 몬스터 이름까지 게임 내 주요 사물 근처에 다가가면 이를 지칭하는 음성이 연달아 쏟아진다.
또 마을 안에서 퀘스트(임무)를 수행할 때 목적지를 알려주는 '핀 사운드'(음성 길 안내)가 제공된다. 캐릭터가 목적지 방향으로 바르게 갈 경우 '둥둥' 하는 맑은소리가 나오고, 잘못된 길로 향하면 듣기 불편한 소리가 나오는 식이다.
이들과 함께 게임을 즐기는 비장애인 동호회원인 닉네임 허벅지 주 모 씨(44·남)는 "TTS가 쉴 새 없이 나오는 걸 보고 처음엔 조금 놀랐다"며 "게임 효과음과 TTS 음성이 뒤섞인 복잡한 소리를 구분해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며 게임을 하는 것이 마치 초능력자 같은 모습"이라고 말했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서예림 씨(닉네임 아이린, 31·여), 김준형 씨(닉네임 오토핀사운드, 34·남), 박동희 씨(닉네임 힐링, 40·남), 황인상 씨(닉네임 블루스, 32·남)가 '디아블로4'를 즐기는 모습. 2026.2.20 © 뉴스1 이기범 기자
게임에서 제공하는 음성 안내와 기능이 제한적이거나 품질이 떨어진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잘못된 방향으로 길을 안내하거나 길 찾기가 가장 중요한 던전에서는 아예 음성 길 안내 기능이 꺼진다.
김 씨는 "전맹 입장에서 초창기엔 게임을 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조금씩 접근성 기능이 개선돼 왔다"며 "'아기다리고기다리'처럼 말은 띄어쓰기가 중요한데 처음엔 쉼표, 마침표를 구분하지 않고 문자를 읽어주다가 어느 순간부턴 구분해서 읽더라"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여전히) 저품질 음성 엔진을 써서 발음 구분이 쉽지 않다. 특히 던전에서 꺼지는 음성 내비게이션 기능이 가장 큰 하자"라며 "그것만 아니면 게임을 좀 더 쉽게 할 수 있을 텐데"하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들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심정으로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게임을 즐기고 있다. 몬스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기술을 쓰거나 어느 위치에 어떤 기능이 있는지 달달 외워서 게임을 하는 식이다.
음성 길 안내가 제공되지 않는 던전에서는 벽을 긁으면서 끝내 길을 찾아낸다. 저시력자인 서예림 씨에게 길잡이 역할을 맡기기도 한다. 서 씨는 모니터를 쓰지 않는 전맹 게이머들과 달리 모니터에코가 닿을락 말락 한 거리로 눈을 갖다 대고 잔존 시력을 활용해 길을 파악한다.
시각장애인 게임 동호회(길드) '오토핀사운드'의 동호회원인 서예림 씨(닉네임 아이린, 31·여)가 길잡이 역할을 하는 모습. 2026.2.20 © 뉴스1 이기범 기자
이들은 조만간 디아블로4의 개발사인 블리자드 측에 '접근성 개선 제안서'를 전달할 예정이다.디아블로4 뿐만 아니라 다른 게임들도 '접근성'이 개선되길 기대하고 있다.
김 씨는 2015년부터 시각장애인 권리 구제를 위한 소송을 진행하는 등 다양한 사회적 활동으로 이름을 알린 바 있다. 2023년 11월에는 에버랜드 탑승 거부에 부당한 차별이라며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했다. 2021년에는 서울고등법원으로부터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시·청각 장애인들이 영화관람을 할 수 있도록 편의 제공을 해야 한다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김 씨가 이 같은 사회 활동에 나선 건 눈이 안 보인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걸 할 수 없는 상황이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 씨가 게임 접근성 기능을 제안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김 씨는 "(온라인) 게임을 하다 보면 단절된 인연이 이어지거나 뜻밖에 좋은 인연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다"고 게임이 갖는 의미를 설명했다.
접근성 기능은 '유니버설 디자인'(보편적 설계)이라고도 불린다. 배려가 아닌 모두를 위한 기술이라는 철학을 담고 있다. 김 씨는 제안한 개선 사항들이 실행될 경우 비장애인 게이머에게도 유의미한 사용자 경험(UX) 개선 효과가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동권 보장을 위한 지하철 엘리베이터가 모두에게 도움이 되듯.
"(시력이 남아 있던) 어릴 때 재밌는 게임이 많았고, 그걸 즐긴 기억이 있어요. 그래서 앞으로 하고 싶은 게임도 많아요. 남들 하는 거 하고 싶었던 거죠."
시각장애인 게임 동호회(길드) '오토핀사운드'가 '디아블로4'를 플레이 하고 있다. 2026.2.20 © 뉴스1 이기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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