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묵은 정유 공정 상식 바꿨다···'분자 정유' 가능성 열어

IT/과학

이데일리,

2026년 6월 25일, 오전 12:01

[이데일리 강민구 기자] 한국과학기술원(KAIST) 연구진이 차세대 분리막 기술을 개발해 100여년간 지속된 ‘끓여서 나누는’ 정유 공정의 상식을 바꿀 가능성을 제시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고동연 KAIST 생명화학공학과 교수 연구팀이 원유를 끓이지 않고 값싼 고분자 막만으로 상온에서 정밀하게 걸러 내는 데 성공했다고 25일 밝혔다.

고동연 KAIST 교수.(사진=KAIST)
고동연 KAIST 교수.(사진=KAIST)
최근 국제 정세 변화에 따른 유가 변동이 물가 전반을 위협하는 가운데, 그 바탕에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원유를 350도 이상으로 펄펄 끓여온 고에너지 소비형 정유 공정이 자리 잡고 있다.

실제 전 세계 정유 공장이 원유를 끓였다가 식히는 ‘증류’ 방식에 의존하며 소비하는 에너지는 연간 1100TWh(테라와트시)에 달하며, 국내 정유·석유화학 산업의 온실가스 배출량도 국가 전체 배출량 중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글로벌 석유화학 시장의 공급 과잉과 원가 경쟁력 심화까지 겹치면서, 기존 고에너지 소비형 구조를 근본적 체질 개선 없이는 경쟁력 확보가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이에 학계는 원유를 끓이지 않고 분리막으로 걸러내기 위한 연구에 주목해 왔다. 다만, 분자 단위의 초정밀 분리를 구현하려면 분리막 표면에 머리카락 두께보다 훨씬 얇은 ‘선택층’을 반드시 코팅해야 한다는 것이 지배적인 상식이었다.

그러나 선택층을 도입하면 소재 개발과 코팅 공정이 추가돼 제조 비용이 높아지고, 면적이 커질수록 코팅 결함이 생기기 쉬워 산업 규모로 확장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었다.

연구팀은 이 상식을 완전히 뒤집고, 분리막에 아무런 코팅을 하지 않은 값싼 다공성 고분자 막에 원유를 그대로 흘려보내는 접근을 시도했다. 그 결과 원유 속의 무거운 기름 성분들이 분리막 내부의 미세한 구멍에 스스로 들러붙으며, 머리카락 굵기의 5만분의 1 크기인 2나노미터(nm) 이하의 정교한 미세 통로를 형성했다. 복합 혼합물인 원유가 분리막과 상호작용하며 스스로 맞춤형 ‘체’를 완성한 것이다.

이 체에 있는 통로를 통해 가벼운 나프타, 휘발유, 등유 성분만 빠르게 분리됐고 무거운 찌꺼기는 사실상 완전히 걸러졌다.

선택층 없이 원유를 거르는 상온 분리막.(자료=KAIST)
선택층 없이 원유를 거르는 상온 분리막.(자료=KAIST)
기존에 보고된 최고 수준의 원유 분리막 대비 23배나 빠른 분리 속도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28일간 원유 분리를 지속해도 성능 저하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기술은 막대한 설비 교체 비용 없이 기존 정유 공장의 배관 시스템에 필터 모듈을 추가하는 형태로 즉시 적용할 수 있다.

원유를 이 분리막에 통과시켜 나프타, 휘발유 등을 먼저 분리하고 남은 성분만 기존 증류탑에서 증류할 경우, 처음부터 증류하는 경우보다 에너지는 31.6%,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37.6%를 감축할 수 있으며 운영비도 36% 절감된다.

고동연 KAIST 교수는 “분리막이 혼합물과 만나 스스로 최적의 분리 통로를 빚어낸다는 새로운 과학적 원리를 규명해낸 성과”라며 “실제 원유를 공급해 준 HD현대오일뱅크와 협력한 덕분에 실험실을 넘어 산업 현실에 맞닿은 수준까지 검증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에 25일 게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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