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머크(MSD)가 2017년 ISS에서 진행한 키트루다 단백질 결정화 실험을 시작으로 일라이릴리·아스트라제네카·노바티스 등 주요 제약사들이 잇따라 우주 연구에 뛰어들었다. 스페이스엑스(X)가 최근 기업가치 1조7500억 달러(약 2695조9000억원)로 나스닥에 상장하며 민간 우주산업 전반에 자금이 몰리고 있다. 이에 따라 제약·바이오 업계의 우주 진출도 새로운 변곡점을 맞고 있다는 평가가 제기된다.
글로벌 기업들의 우주제약 연구 현황.(그래픽=김일환 기자)
◇빅파마가 우주로 갈 수 밖에 없는 이유
의약품 개발은 기본적으로 중력을 전제로 이뤄져 왔다. 지상에서는 중력의 영향으로 세포가 바닥으로 가라앉고 단백질 결정 형성 과정에서도 대류와 침강이 발생한다. 조직 모델 역시 중력 방향에 따른 구조적 편향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 구조 기반 신약 설계에는 표적 단백질의 3차원 구조 분석이 핵심으로 꼽힌다. 하지만 지상 환경은 대류를 유발해 결정 성장을 교란하고 중력에 의한 불균일 성장을 유발한다는 게 한계로 꼽혔다.
우주의 미세중력 환경은 이런 물리적 한계를 완화한다. 결정 주변이 안정화되면서 균일한 영양 공급이 가능해지고 침강이 제거돼 단일 핵형성 이벤트가 촉진된다. 그 결과 우주에서는 흔히 발생하는 결정 결함과 크기 불균일성 문제가 줄어든다. 결정 크기도 균일해지며 회절 데이터 품질도 개선된다.
더 좋은 구조 정보는 곧 더 정확한 신약 개발로 이어진다. 정밀한 구조 정보를 확보하면 선도물질 도출과 최적화 과정에서 반복 실험을 줄여 개발 효율을 높일 수 있다. 이는 국제우주정거장(ISS)가 민간에 개방된 2016년 이후 이 같은 특성을 활용하려는 글로벌 빅파마들의 움직임이 본격화한 배경이기도 하다.
◇머크가 포문 연 우주의학…빅파마 줄줄이 참전
우주 신약 개발의 포문을 연 곳으로 미국 머크(MSD)가 꼽힌다. 머크는 2017년 자사 블록버스터 면역항암제 키트루다의 주성분인 펨브롤리주맙을 ISS로 보내 단백질 결정 최적화 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 머크는 무중력 환경에서 더 균일하고 점도가 낮은 결정이 형성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해당 연구는 2019년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됐다.
머크는 해당 결과를 바탕으로 지구에서도 키트루다를 균일하게 작은 입자로 만드는 실험을 이어갔다. 그 성과가 키트루다 피하주사(SC) 제형 개발로 이어졌다. 이를 통해 머크는 기존 정맥주사(IV) 중심이던 치료를 간편한 주사 방식으로 전환하는 기반 기술을 확보했다. 이에 따라 우주 실험이 치료 접근성 향상과 투여 비용 절감, 나아가 특허 만료 이후 시장 독점 기간 연장 가능성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평가가 제기된다.
머크의 성과 이후 △일라이릴리 △아스트라제네카 △노바티스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BMS) △암젠 등 다수의 글로벌 제약사가 ISS에서 단백질 결정화, 질병 모델링, 신약 전달 시스템 개선 등의 연구개발(R&D)을 진행하고 있다.
일라이릴리는 항공우주 제조업체 레드와이어와 손잡고 의약품 제조 플랫폼 필-박스를 활용해 2022년부터 당뇨병·통증·심혈관질환 치료제 개발을 위한 우주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비만·당뇨 분야 글로벌 선도기업인 일라이릴리가 우주 연구를 통해 신약 발굴과 제형 혁신 가능성을 검증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이오업계의 관심이 크다.
아스트라제네카는 2019년부터 미세중력 환경에서 나노입자 및 약물전달체의 거동을 분석해 암 백신과 정밀의료용 약물전달 플랫폼 개발 가능성을 검토했다. 이는 우주 환경을 활용한 차세대 백신 플랫폼 연구의 초기 사례로 평가받는다. BMS는 2019년부터 2022년까지 ISS에서 항체의약품 등 생물학적 제제의 단백질 결정 성장 연구를 수행하며 고농도 제형 개발과 생산 공정 최적화를 추진했다.
◇스타트업까지 가세한 우주 신약 개발
빅파마 중심이던 우주 신약 개발은 점차 전문 스타트업으로도 확장되고 있다. 미국 바르다스페이스인더스트리스는 ISS가 아닌 자체 캡슐을 지구 저궤도에 올려 의약품을 결정화하는 방식으로 2023년 HIV 치료제 리토나비르의 새로운 결정형 제조에 성공했다. 이는 우주에서 제조한 뒤 캡슐을 회수까지 마친 세계 최초의 상업적 우주 의약품 제조 실증 사례로 꼽힌다.
연구 영역도 단백질 결정화를 넘어 확장되고 있다. 장기·조직 생리를 시험관 내에서 재현하는 미세생리시스템(MPS)은 미세중력 환경에서 침강·부력·대류의 영향을 줄여 약물 독성·효능 평가의 정밀도를 높일 가능성이 있는 분야로 꼽힌다. 미국 국립보건원(NIH)과 ISS National Lab은 우주 조직칩 연구(Tissue Chips in Space) 프로그램으로 ISS에서 여러 장기 MPS를 운용해 왔다.
지난해부터는 다장기 연결형 자동화 시스템을 활용하는 2.0 프로그램으로 연구를 확대하고 있다. 3차원(3D) 바이오프린팅과 줄기세포 연구 역시 우주 환경 활용 분야로 꼽힌다. 미세중력에서는 세포와 생체재료가 균일하게 분산될 수 있어 지상에서 중력 때문에 무너질 수 있는 연조직 구조를 지지체 없이 구현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국내 우주바이오 기업 스페이스린텍은 지난해 8월 자체 개발한 우주의약 연구 모듈을 ISS에 올려 단백질 결정화 실험을 완료했다. 결과물은 올해 2월 지구로 회수돼 국내 최초 ISS 미세중력 단백질 결정 확보 사례를 남겼다.
지난해 11월에는 누리호 4차 발사에 국내 최초 우주바이오 전용 큐브위성을 탑재해 면역항암제 키트루다 주성분인 펨브롤리주맙의 결정화 실험을 자동으로 수행하기 시작했다. 이는 단백질 의약품 결정화를 큐브위성 플랫폼에서 진행한 세계 최초 사례로 꼽힌다. ISS 중심이던 글로벌 빅파마의 우주 연구가 위성 기반의 우주 위탁개발생산(CDMO) 모델로 진화하고 있다.
◇2030년 16억 달러 시장…발사 비용 하락으로 속도전 기대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에 따르면 우주의학 시장 규모는 2023년 7억7000만달러(약 1조2000억원)에서 연평균 11%씩 성장해 2030년에는 16억달러(약 2조3000억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전문가들은 우주 CDMO에 주목하고 있다.
과거 우주 단백질 결정화 연구가 구조 규명 자체를 목적으로 했다면 최근에는 상업적 가치가 있는 의약품의 제형과 제조로 초점이 옮겨가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 단계를 넘어 실제 양산 체계로 전환될 경우 신약 개발 과정의 비용과 시간을 동시에 줄이는 혁신이 가능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바이오업계 관계자는 "2010년대까지만 해도 화물을 우주로 보내는 데 1㎏당 500만원이 넘는 비용이 들었다. 하지만 스페이스X의 재사용 발사체 팰컨9 덕분에 현재는 1㎏당 200만원 선까지 낮아졌다"며 "초대형 발사체인 스타십이 상용화되면 이 비용은 1㎏당 150만원 이하로 더 떨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민간 기업이 우주산업에 본격 참여하면서 가능해진 구조"라며 "발사 비용이 낮아질수록 우주는 검증의 공간을 넘어 생산의 공간으로 확장될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