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수 라온시큐어 서비스사업본부장(전무이사)
2007년 미국 메이저리그 클리블랜드의 에이스는 19승을 거뒀다. 평균자책점 3.06, 사이영상 투표 4위. 구단은 그의 구속을 재고, 투구 하나하나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 숫자들은 모두 사실이었다.
정작 확인하지 못한 것은 따로 있었다. 마운드 위에 선 사람이 누구인가였다.
2012년 1월, 그 에이스는 도미니카공화국의 미국 영사관 앞에서 체포됐다. 미국에서 쓴 파우스토 카르모나라는 이름부터 가짜였고, 세 살 어린 나이도 그 이름에 딸려 온 것이었다. 본명은 로베르토 에르난데스 에레디아. 십여 년간 미국 야구가 그에 대해 몰랐던 것은 단 하나, 그가 누구인가였다.
이 질문은 이제 사람에게만 던져지지 않는다. 최근 오픈AI와 앤트로픽, 메타는 자사 AI 모델이 외부 기관 시스템에 무단 접근한 사례를 잇달아 공개했다. 인증의 경계를 넘고, 허용된 권한 밖까지 움직였다. AI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려하기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다. ‘설마’는 생각보다 빨리 현실이 됐다.
AI는 주어진 과제를 수행했다. 실행 결과도, 남겨진 로그도 진짜였다. 문제는 그 능력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누구의 권한으로 어디까지 움직여도 되는지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같은 질문을 먼저 받았던 야구는 그 뒤 십여 년을 인증에 썼다. 우선, 신원 확인 근거를 서류에서 몸으로 옮겼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해외 유망주의 나이와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DNA 검사와 골 연령 판독까지 동원했다. 위조할 수 있는 출생 신고 종이 대신 쉽게 바꿀 수 없는 근거를 요구한 것이다.
'에이전틱AI(Agentic AI)' 앞에 선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같은 원칙이다. 한 번의 명령으로 여러 시스템을 오가며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에이전틱AI의 특성상 출입문에서 한 번 확인하고 들여보내는 방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Capability)'보다, '누구의 인가를 받아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는가(Identity & Authority)'를 실시간으로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업무가 바뀌면 권한도 달라져야 하고, 정해진 경계를 벗어나는 순간 행위는 멈춘다. 자율성이 커질수록 통제는 더 촘촘해질 수밖에 없다. 위조할 수 없되 검증은 가능한 고유 신원을 AI에 부여해야 한다는 데 학계와 산업계의 시선이 모이는 이유다.
이러한 통제의 출발점이 분산신원인증(DID·Decentralized Identity)이다. 에이전틱AI의 신원을 확인하고, 그 신원에 부여된 역할과 권한에 따라 접근할 수 있는 시스템과 데이터를 구분하는 방식이다. 개발을 맡은 AI에는 코드 저장소를, 고객 응대를 맡은 AI에는 상담 이력만 열어주는 식이다.
신원 확인만으로 끝나는 문제는 아니다. 에이전틱AI의 권한은 개별 정책에 맞춰 유연하게 움직인다. 업무와 상황이 바뀌면 열리는 문도 함께 바뀌고, 어떤 신원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는다. 문을 무조건 잠그는 대신, 문마다 알맞은 열쇠를 다르게 쥐여주는 셈이다.
DID 기반의 우리나라 모바일 신분증은 이미 현실에서 디지털 신원 체계의 실효성을 보여주고 있다. 에이전틱AI에이전틱AI 시대의 DID 기반 인증은 더 이상 문을 열어주는 절차에 그치지 않는다. 누가 들어왔는지를 확인하고,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정하는 질서다.
미국 빅테크의 사고는 이런 준비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음을 시사한다. 통제된 시험 환경에서 벌어진 일조차 그 정도였다. 하물며 실제 업무 환경에서는 에이전틱AI가 오가는 시스템은 훨씬 많고, 이를 지켜보는 눈은 훨씬 적다.
더 큰 문제는 다음 단계다. 에이전틱AI의 영역이 로봇과 자율주행, 스마트팩토리로 확장되면 권한 오용은 화면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 명령 하나가 실제 설비를 움직이고 사람이 있는 공간에 닿는다. 그때 가서 신원을 확인하고 권한을 다시 설계하기에는 늦다.
기업들이 에이전틱AI를 업무에 투입하는 흐름은 이미 급물살을 탔다. 관건은 얼마나 빨리 들이느냐가 아니라, 들이기 전에 무엇을 정해두었느냐다. 명확히 통제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권한 위임은 기업 보안의 열쇠를 흘린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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