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전 세계 마테크 솔루션은 1만 5,505개에 달한다. 전년 대비 표면상 순증은 121개에 불과하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1,488개가 신규 진입하고 1,367개가 퇴출당하는 격렬한 생존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도구는 이미 넘쳐나지만, 기업들의 마케팅 효율은 오히려 정체되어 있다.
문제의 본질은 도구의 부재가 아니라, 파편화된 기술을 하나로 잇지 못하는 ‘연결의 부재’에 있다. 오늘날 마케팅의 병목은 더 이상 매체 바잉이나 단순 콘텐츠 생산에 있지 않다. 핵심은 데이터와 도구를 이어 붙이는 ‘엔지니어링’ 영역으로 이동했다. 마케팅은 이제 완벽히 소프트웨어가 됐다.
십여 년 전만 해도 마케팅 조직이 지향하던 인재상은 넓은 기본기 위에 특정 전문성을 더한 ‘T자형 마케터’였다. 하지만 AI 시대에 이르러 이 전제는 완전히 해체됐다. 퍼포먼스 마케팅과 CRM은 물론, 검색 최적화(SEO) 영역조차 AI 검색 답변에 자사 브랜드를 노출시키는 GEO와 AEO라는 새로운 전문 분야로 세분화됐다.
마케팅의 세부 영역이 100여 개 이상으로 갈라진 상황에서, 각 영역마다 ‘사람이 하던 업무’ 위에 ‘AI 에이전트와 데이터 파이프라인’이라는 새로운 레이어가 중첩됐다. 이는 단 한 명의 제너럴리스트나 단일 마케팅팀이 커버할 수 있는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 구조적 한계다.
마케팅은 현존하는 가장 발전된 기술 수준 이상으로 실행될 수 없다. 뒤집어 말하면 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마케팅이 할 수 있는 일의 상한도 올라간다. 지난 10년간 모바일과 AI를 거치며 채널과 기술은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나, 마케팅 현장의 실행 속도는 이를 따라잡지 못했다.
기술의 폭발은 역설적으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판이 커졌음을 의미한다. 이제 마케팅의 창의성은 기발한 메시지에만 갇히지 않는다. 기술을 어떻게 다루고 연결할 것인가에 대한 ‘기술적 상상력’이 실력의 핵심이 됐다.
◇팔란티어의 FDE, 마케팅의 FDM
실마리는 글로벌 AI 기업 팔란티어(Palantir)의 동작 방식에 있다. 팔란티어는 단순 소프트웨어 라이선스만 판매하지 않는다. FDE(Forward Deployed Engineer, 전방 배치 엔지니어)를 고객사 현장에 상주시켜 데이터를 정의하고, AI 인프라를 레거시 시스템과 연동하며, 문제 해결에 필요한 워크플로우를 현장에서 직접 구축한다.
마케팅 생태계에도 정확히 이 구조가 필요하다. 보고서만 남기고 떠나는 컨설팅사나, 요구사항대로 개발만 하고 철수하는 SI 파견 인력이 아니다. 고객사의 성장 조직 한가운데로 직접 걸어 들어가는 ‘FDM(Forward Deployed Marketer, 전방 배치 마케터)’ 스쿼드다.
그로스 마케터, 데이터 엔지니어, AI 에이전트 개발자가 한 팀을 이루어 고객사 현장에서 비즈니스 목표부터 함께 정의한다. 단순한 이론이 아니다. 필자가 이끄는 NNT에서 마케터와 개발자를 묶은 스쿼드로 실제 현장에 투입되어 일하고 있는 ‘에이전틱 에이전시(Agentic Agency)’ 모델이다.
◇현장에서 입증되는 데이터 엔지니어링의 힘
수만 명의 아웃바운드 조직을 운영하는 금융사나 복잡한 B2B2C 퍼널을 가진 기업은 정제된 데이터 기반의 단일 솔루션으로 풀리지 않는다. FDM은 현장 실무진 인터뷰에서 시작해 측정 불가능했던 퍼널을 데이터 마트로 재설계하고, 고객사의 기존 레거시 시스템 위에서 주 단위 가설-검증 루프를 돌려 성과를 숫자로 입증한다.
실제로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목격되는 대표적인 문제 상황이 있다. 여러 글로벌 브랜드의 AI 검색 인용 상태를 분석해 보면, 정작 브랜드의 공식 채널은 외면받고 그 빈자리를 비공식 뉴스나 블로그가 대신 채우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AI는 ‘모른다’고 답하지 않는다. 추론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답변의 빈칸을 채워 넣는 것이 LLM의 본질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콘텐츠를 많이 써내는 방식으로 풀 수 없다. 인용을 측정하는 인프라를 구축하고 데이터 출처를 능동적으로 관리하는 엔지니어링 과제인 동시에, 정교하게 설계된 콘텐츠 마케팅이 동반되어야 풀리는 문제다.
또 다른 사례로 한 글로벌 리빙 브랜드에서는 상품 피드 데이터의 정합성을 재설계하는 작업만으로 다섯 달 만에 검색 유입 트래픽 43%, 해당 채널 매출 41% 증가라는 성과를 거둔 바 있다. 단발성 캠페인이 아닌 데이터 구조를 손본 결과다.
◇보고서가 아닌 ‘작동하는 시스템’을 남긴다
FDM이 완성하는 최종 산출물은 한 장의 PPT 보고서가 아니다. 프로젝트가 종료된 후에도 고객사 내부에서 스스로 작동하는 ‘AI 기반 운영 체계’다. 수십 차례의 실험으로 검증된 세그먼트 로직, 소구점, CTA 패턴, 성과 판정 기준은 모두 코드 형태의 AI 에이전트로 변환된다. 반복적인 세그먼트 추출이나 AI 검색 인용률 모니터링 등은 에이전트가 자동 수행(Co-pilot)하도록 이식된다.
FDM은 0에서 1을 만드는 고난도 엔지니어링 문제를 현장에서 대신 풀고, 마케팅적 상상력을 기술로 구현해 검증된 플레이북의 소유권을 고객사에 완벽히 이관한다. 이것이 기술과 실행이 단절된 마케팅 시장에서 AI 시대를 건너가는 가장 현실적이고 강력한 파트너십이다.
◇AI 시대, 더욱 무거워지는 ‘사람’의 자리
AI가 코드와 콘텐츠 생산을 사실상 공짜로 만들면서 실험과 자동화의 속도는 한층 가빠졌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럴수록 사람의 역할은 한층 무거워진다. 어떤 맥락의 메시지가 고객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파악하는 취향(Taste), 인간에 대한 공감, 전략적 방향성을 결정하는 의사결정은 AI가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AI에 맡길 범위를 끊임없이 재정의하고 선을 그어 나가는 것이 곧 마케팅 조직의 진짜 실력이다.
2026년 이후 마케팅의 성패는 AI 도구를 몇 개 구독하느냐가 아니라, 파편화된 기술과 데이터를 현장에서 잇는 엔지니어링 체계를 갖추었는가에 달려 있다. 이제 파트너를 향한 질문도 달라져야 한다. “어떤 보고서를 써줄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남기고 떠날 것인가”다.
마케팅은 소프트웨어가 됐다. 그러나 그 소프트웨어가 수많은 데이터 파이프라인과 에이전트를 거쳐 마침내 다다르는 목적지는, 여전히 시장(Market) 속 사람이다.
◇조경상 NNT 대표는
AI와 데이터를 기반으로 기업의 마케팅 전략 수립부터 실행, 성과 분석까지 성장의 전 과정을 설계하는 ‘AI 기반 그로스 마케팅’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2020년 윤성준 CTO와 함께 설립한 NNT는 단순 광고 대행을 넘어 AI 에이전트와 개발팀, 자체 AI 솔루션을 결합해 마케팅 전략과 실행을 자동화하는 ‘에이전틱 에이전시(Agentic Agency)’를 지향한다.
검색엔진 최적화(SEO)와 AEO·GEO, 고객관계관리(CRM), 앱스토어 최적화(ASO), 퍼포먼스 마케팅(UA), 데이터 엔지니어링 등 디지털 마케팅 전 영역을 아우른다. NNT는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배달의민족, 무신사 등 주요 기업과 350건 이상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AI와 데이터를 실제 비즈니스 성장에 연결하는 경험을 쌓아왔다.
조 대표는 배달의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에서 전략기획을 담당한 뒤 브레이브모바일(숨고)을 공동 창업했다. 이전에는 딜로이트컨설팅과 Nielsen Advanced Analytics Consulting에서 컨설턴트로 활동하며 전략과 데이터 분석 분야의 전문성을 쌓은 바 있다. 카네기멜론대학교에서 통계학 석사 학위를, 애리조나대학교에서 수학·경영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