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IT열전]③ 이재웅과 다음… 이메일 대중화 시대를 열다

IT/과학

이데일리,

2026년 October 10일, AM 12:01

혁신이 필요한 시대, 이데일리는 한국 벤처·스타트업 업계를 이끌었던 인물들을 조망하는 열전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우리 시대의 창업 꿈나무들에게 교순을 줄 수 있는 인물들이 대상입니다. 일부 논쟁적인 인물이라도 벤처·스타트업의 도전과 성공이라는 관점에서 그들의 삶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이데일리 김유성 기자] 1997년 말 외환위기의 충격을 겪은 한국 사회는 1990년대 말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정부는 정보통신 산업을 새로운 한국의 먹거리로 삼고 집중적인 투자를 했다. 저렴한 가격의 국민PC 보급을 추진했고 초고속인터넷망 구축도 지원했다. 그 위를 인터넷 벤처기업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때 대표 주자 중 하나가 한메일(혹은 다음)의 이재웅이었다. 당시 인터넷을 이용하던 우리나라 사람들 상당수가 ‘한메일’(hanmail) 주소를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지금은 이메일 주소 하나를 만드는 게 특별하지 않다. 허나 당시에는 달랐다. 인터넷에 자신만의 주소가 생겼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경험이었다. 종이 편지와 유선전화로 소식을 전하고 안부를 묻던 이들에게는 가히 ‘센세이션’이라 할 만한 변화였다.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대학 동아리 활동을 하기 위해 이메일을 만들었다.

1998년 12월 한메일넷 첫화면. 이 이미지를 기억한다면 당신은 한국 인터넷 얼리어답터. (출처 : 한국경제인협회 디지털기업인 박물관)
1998년 12월 한메일넷 첫화면. 이 이미지를 기억한다면 당신은 한국 인터넷 얼리어답터. (출처 : 한국경제인협회 디지털기업인 박물관)
물론 한메일에 도전하는 여러 포털 메일 서비스가 나왔다. 엠파스의 엠팔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이라고 평가할 만한 30MB의 메일 저장 용량을 제공했다. 한메일의 무료 용량이 5MB였던 때라 ‘이걸 언제 다 써?’라면서 반기기도 했다. 그래도 2000년대 중반까지 한메일은 국내 웹메일의 대명사였다.

한메일은 이재웅과 공동창업자들의 작품이다. 다만 이재웅은 1990년대를 관통했던 다른 IT 벤처인들과 달리 프랑스에서 인간의 인지와 사고를 연구한 경력을 갖고 있다. 대학 시절 컴퓨터를 공부했다고 하지만, 그의 초기 사업 구상은 이메일이나 검색보다 문화와 예술에 더 가까웠다.

2001년 국내 자동차 광고에 나왔던 이재웅. 당시 성공한 CEO의 전형이었다.
2001년 국내 자동차 광고에 나왔던 이재웅. 당시 성공한 CEO의 전형이었다.
◇SF 소설을 읽고 컴퓨터에 빠졌던 소년

1968년 서울에서 이재웅은 태어났다. 이재웅에게 행운이었던 것은 그의 부모가 모두 공학을 공부한 인텔리였다는 점이다. 아버지 이철형 씨는 한국종합건설 대표를 지낸 기업인이었다. 덕분에 이재웅은 어릴 때부터 공학용 계산기를 접했고 수학과 과학에도 흥미를 느꼈다.

책도 좋아했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때 SF 소설 60권짜리 전집을 선물받았는데, 일주일 만에 모두 읽었다. 우주와 미래, 아직 존재하지 않는 기술에 대한 상상과 동경이 자리 잡았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때 그의 일생에 결정적인 선물을 받게 된다. 컴퓨터였다. 애플Ⅱ를 모방한 ‘청계천표’ 호환 컴퓨터였다. 앞서 소개했던 이찬진과 안철수처럼 일찍이 컴퓨터를 접하게 된 게 결정적이었다.

PC를 갖게 된 많은 소년이 그렇듯 그도 처음에는 게임을 했다. 그러다 베이직(BASIC)이라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웠다. PC 모니터에 영문 명령어를 입력하면 그대로 실행되는 게 소년 이재웅에게는 경이로웠다.

훗날 진행됐던 넥슨컴퓨터박물관의 ‘내 인생의 컴퓨터’ 프로젝트에서 그는 컴퓨터가 외부 세계와 소통하는 매개였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공학을 공부했던 부모, 어린 시절 읽었던 과학책과 SF 소설, 고등학생 때 선물받은 컴퓨터가 그를 전산학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는 1986년 연세대 전산과학과에 입학했다.

그가 연세대에 입학했던 1980년대 중반은 국내에 PC가 보급되기 시작했던 때였다. 여러 대의 컴퓨터가 놓이게 되고 이를 연결해 정보를 주고받으려는 시도가 진행됐다. 기초적인 인터넷의 싹이 트고 있었다. 이재웅은 대학에서 컴퓨터를 공부하면서 네트워크의 가능성을 경험했다.

1989년 그가 접한 비트넷(BITNET)은 새로운 세계를 보여줬다. 비트넷은 미국 대학들을 중심으로 발전한 학술 컴퓨터 네트워크였다. 멀리 떨어진 대학과 연구기관들이 전자우편과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인터넷 문화의 선구적 시스템이었다. 한 대의 컴퓨터로 프로그램을 실행하던 세계가 여러 컴퓨터를 연결하는 세계로 확장되고 있었다.

이재웅은 이때 곧 변화할 시대를 감지했을 것 같다. 컴퓨터 네트워크에서는 이용자가 직접 정보를 만들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누구나 정보를 생산하고 공유할 수 있는 주체가 된 것이다. 새로운 소통의 공간이 열릴 수 있다는 의미였다.

대학에서 그와 같은 관심을 가진 후배도 만났다. 그중 한 명이 이택경이었다. 이택경은 이재웅보다 네 학번 아래인 연세대 후배였다. 두 사람은 PC통신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교류했다. 이 두 사람의 인연은 한국 인터넷 산업의 역사로까지 이어졌다.

이재웅은 1991년 연세대 전산과학과를 졸업했고 1993년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다음 행보는 취업이나 창업이 아닌 프랑스 유학이었다.

◇프랑스 유학 후 한국에서 창업

1993년 이재웅은 프랑스로 떠났다. 그곳에서 공부한 분야는 인지과학이었다. 인지과학은 인간이 정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사고하는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컴퓨터과학과 심리학, 언어학, 인공지능 등이 만나는 학제 간 연구 분야이기도 했다.

2001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이재웅은 프랑스에서 다양성의 가치를 배웠다고 회상했다. 어느 하나만 옳다는 식의 사고에서 벗어나 서로 다른 생각이 공존할 수 있음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의 인생을 바꾼 또 다른 계기가 있었다. 언어학자이자 사회비평가인 노엄 촘스키의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촘스키는 언어학 연구의 거장이면서 기존 언론과 권력의 관계를 비판해 온 학자다.

이재웅은 촘스키를 다룬 영화를 보면서 기존 언론의 문제점을 짚고 독립적인 미디어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여기서 인터넷이 할 수 있는 역할과 가능성을 발견했다.

기존 언론사나 거대한 자본이 독점하던 정보 유통 방식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새로운 미디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했다.

이런 생각을 구체적인 사업으로 옮기게 한 인연이 있었다. 프랑스 유학 시절 다시 만난 고등학교 동창 박건희였다. 박건희는 중앙대학교에서 사진을 공부한 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두 사람은 파리의 한 식당에서 만나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는 인터넷이 세계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고 글을 올리거나 그림과 사진을 게시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시도였다. 두 사람은 인터넷이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예술가와 관객을 연결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이재웅은 창업을 결심했다. 그의 부모도 그 선택을 지지했다.

이재웅은 안정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랐던 점이 새로운 사업을 하는 데 원동력이 됐다고 봤다. 그리고 젊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면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재웅과 박건희는 귀국했고 연세대 후배 이택경이 합류하면서 새 회사가 설립됐다. 1995년 2월 16일 다음커뮤니케이션의 시작을 알렸다. 이재웅은 당시 스물여섯 살이었다.

◇다음의 첫시작은 가상미술관

다음커뮤니케이션의 초기 자본금은 5000만원, 사무실은 청담동에 있는 20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책상 세 개가 놓였다. 회사 이름은 ‘현재 이후의 시간’을 뜻하는 다음이었다. 한자로는 여러 소리라는 의미의 ‘다음(多音)’을 담았다. 여러 목소리가 어우러지는 미래를 만들자는 취지였다.

첫 사업은 인터넷에 문화와 예술 콘텐츠를 올리고 이를 이용자에게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버추얼갤러리(Virtual Gallery)’라는 인터넷 가상미술관이었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의 소식을 인터넷으로 전했고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을 소개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기도 했다. 패션 정보를 제공하는 ‘패션넷’, 청소년 대상 웹진 ‘채널텐’ 등으로도 영역을 넓혔다.

문제는 시장이었다. PC통신이 여전히 중심이었고 인터넷 이용자는 많지 않았다. 인터넷용 콘텐츠를 만드는 데에는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이를 통한 수익 창출은 어려웠다. 회사 운영을 위해서는 다른 수입원이 필요했다. 사내 정보망인 인트라넷을 개발하는 용역을 맡거나 기업용 그룹웨어를 개발했다. 이렇게 번 돈을 인터넷 서비스 개발에 투자했다.

그즈음 이메일이 새로운 인터넷 서비스로 관심을 모았다. 다만 이메일은 누구나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서비스가 아니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느린 속도로 전화선을 통해 데이터를 주고받았다. 학교나 연구기관에 속한 사람들이 주로 이메일을 썼고 일반 이용자는 PC통신 서비스에 가입해 제공되는 전자우편 기능을 사용했다.

이때 등장한 게 핫메일이었다. 1996년 시작한 핫메일은 인터넷 브라우저를 통해 무료로 이메일을 이용할 수 있게 했다. 별도의 메일 프로그램을 설치하지 않아도 인터넷에 접속하면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이재웅과 이택경은 인터넷에서 누구나 무료로 이메일을 이용할 수 있게 한다는 구상에 뜻을 모았다. 당장 이용료를 받는 대신 사람들을 모으고, 사람들이 모이면 더 많은 서비스를 제공하자는 취지였다. 어쩌면 오늘날 플랫폼 사업 전략의 초기 형태를 다음의 한메일에서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기술적인 준비도 돼 있었다. 기업용 인트라넷과 그룹웨어를 개발하면서 네트워크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경험을 쌓았던 덕에 곧 한메일넷을 출시할 수 있었다.

1997년 5월이었다. 국내 최초의 무료 웹메일 서비스로 평가받는 한메일넷의 등장은 한국 인터넷 시장에서 중요한 사건이 됐다. 사용 방법도 어렵지 않았다. 인터넷 이용자들은 자신의 이름이나 별명으로 주소를 만들고 그 주소를 친구들과 교환했다. 인터넷상의 신분증을 갖게 된 셈이다.

처음에는 인터넷에 관심이 많은 젊은 층을 중심으로 사용자가 늘더니 이후에는 대학생과 직장인, 일반 가정으로 이용자가 확대됐다.

◇한메일 이후 ‘카페’까지 성공

한메일은 한국 인터넷 이용자들의 기본 서비스가 됐다. 1998년 7월 사용자 수 50만명을 넘겼고 그해 12월에는 100만명을 돌파했다. 1999년 봄에는 200만명 수준까지 늘었다. 가입자가 증가하면서 광고와 전자상거래를 비롯한 다른 사업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당시 선두 포털이었던 ‘야후’의 아성에 도전할 기반도 갖추게 됐다.

당시에도 여러 메일 서비스가 나왔다. 한메일이 이들 서비스와 달랐던 점은 그것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서비스를 준비해 내놓았다는 것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의 대명사처럼 불렸던 ‘카페’다.

1999년 5월 25일 ‘다음카페’가 등장했다.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이 온라인 공간에 모여 글을 쓰고 자료를 올리며 의견을 나누자는 취지였다. PC통신 프로그램이나 복잡한 접속 과정 없이 인터넷 홈페이지에만 들어가면 됐기 때문에 이용하기도 쉬웠다. 학교 동창회, 대학 동아리, 연예인 팬클럽, 취미 모임 등이 만들어졌다.

2000년 당시 다음 초기 화면 (출처 : 한국경제인협회 디지털기업인박물관)
2000년 당시 다음 초기 화면 (출처 : 한국경제인협회 디지털기업인박물관)
한메일과 카페의 성공으로 다음은 지속적인 성장을 했다. 초고속인터넷의 보급은 다음의 성장 속도를 끌어올렸다. 다음은 2000년 4월 회원 수 1000만명을 돌파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2000만명을 넘겼다. 온라인 쇼핑과 금융, 뉴스 등으로 서비스가 확대됐다. 2000년 이재웅은 세계경제포럼이 선정하는 ‘미래의 세계 지도자’ 100인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재웅이 한국 인터넷 산업의 성공을 상징하는 젊은 기업인으로 떠오른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을 연결하겠다던 이재웅의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동시에 야후와 네이버 등과 치열한 포털 경쟁을 벌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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