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와 데이터센터를 확보하더라도 안정적인 전력을 공급받지 못하면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SK그룹이 미국 원전 기술 기업 웨스팅하우스 지분 인수를 검토하는 것도 이런 흐름에서 주목된다. 반도체와 통신을 넘어 원전까지 사업 영역을 넓혀 AI 인프라를 아우르는 전략적 포석으로 해석할 수 있다.
15일 한국경제 보도에 따르면 SK그룹은 국내 원전 설계·조달·시공(EPC) 기업들의 투자액만큼 매칭 투자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두산에너빌리티·삼성물산·현대건설 등과 공동으로 지분 5~10%를 확보하는 구상이다. 최대 인수 자금은 약 3조7000억원으로 추산된다.
SK(034730)그룹은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AI 반도체를 공급하는 SK하이닉스와 데이터센터·통신 인프라 사업을 추진하는 SK텔레콤을 보유하고 있다. 원전 투자까지 더해지면 연산·통신·전력을 아우르는 그룹 차원의 AI 풀스택 전략을 모색할 수 있다. 다만 실제 시너지는 투자에 따른 권리와 사업 참여 범위, 전력 조달 구조를 얼마나 구체화하느냐에 달려 있다.
서울 종로구 SK 서린사옥 전경. 사진=SK그룹 제공
출처=유종선 전 DGIST 교수
AI 데이터센터가 늘면서 안정적인 전력 공급원을 확보하는 일이 기업의 투자와 입지를 좌우하는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태양광과 풍력은 발전량이 날씨와 시간대에 따라 달라지는 만큼, 이를 보완할 안정적인 전원도 필요하다.
최근 열린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토론회에서 유종선 전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에너지공학과 교수는 2030년 글로벌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량이 2024년의 두 배 수준인 945~1000테라와트시(TWh)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탄소 배출이 적고 대용량 발전이 가능한 원전과 소형모듈원전(SMR)이 대안으로 주목받는 배경이다.
◇웨스팅하우스 투자, 원전 기술과 사업 기회 넓힐까
SK가 웨스팅하우스 지분을 확보하고 사업 협력을 확대한다면 기존 SMR 중심의 원전 투자에서 대형 원전으로 사업 영역을 넓힐 가능성이 있다. 웨스팅하우스는 약 1100㎿급 대형 원자로 AP1000을 비롯해 원전 설계와 핵연료 공급, 유지·보수 사업을 한다. SMR인 AP300과 초소형 원자로 eVinci도 개발하고 있다.
웨스팅하우스 지분은 현재 캐나다 자산운용사 브룩필드가 51%, 캐나다 핵연료 기업 카메코가 49%를 보유하고 있다.
다만 지분 투자만으로 원전 기술을 자유롭게 활용하거나 데이터센터 전력을 직접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원전은 인허가와 부지 확보, 자금 조달, 전력망 연결 등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투자 성과를 내려면 지분 확보를 넘어 기술 사용 권한과 실제 사업 참여 조건을 확보하고, 이를 전력 조달로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원전 수출 경쟁력에도 영향…기술 사용권은 별도 과제
웨스팅하우스와의 협력은 한국 원전 산업의 해외 진출 측면에서도 관심을 끈다. 한국은 원전 건설과 기자재 제작, 사업 관리 역량을 갖췄지만 해외 사업에서는 원자로 설계 관련 지식재산권과 수출 통제가 변수로 작용해 왔다. 웨스팅하우스와 한국수력원자력 사이의 분쟁도 이와 관련해 주목받았다.
SK의 지분 투자만으로 한국 원전 산업의 기술 사용권이나 수출 문제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투자자가 확보하는 권리와 원전 기술을 실제 사업에 활용할 수 있는 권리는 다를 수 있다. 구체적인 권리 범위와 계약 조건, 당사자 간 합의 및 정부 간 협의가 뒷받침돼야 한다.
조홍종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SMR 개발 속도도 과제로 지목했다. 유럽 등 일부 국가가 2029년을 목표로 개발에 속도를 내는 만큼, 국내 개발 일정이 늦어지지 않도록 민간의 투자와 혁신을 촉진할 체계가 필요하다는 취지다. 원전 투자와 함께 국내 기술 경쟁력과 사업화 역량을 높이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
출처=유종선 전 DGIST 교수
AI 시대 전력난은 발전소를 늘리는 것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현재 전력 수급의 주요 제약으로 발전량 부족보다 수도권 전력망의 접속 여력 부족을 꼽는다.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이 지방으로 확산하면 2030년 이후에는 비수도권에서도 전력 수급 부담이 커질 수 있다.
김승완 한국에너지공과대 교수는 호남에 대규모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이 들어설 경우 자체 분석상 2030년부터 전력 수급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전망했다. 원전 건설이 진행 중이고 가스터빈도 설비 납기를 맞추기 어려울 수 있어 단기간에 추가 전력을 확보할 수단이 제한적이라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태양광과 배터리, 연료전지를 상대적으로 신속하게 확보할 수 있는 대안으로 꼽았다.
박종배 건국대 전기공학과 교수는 2030년 이전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해 설계수명이 끝난 원전의 계속운전 심사를 신속히 진행하고,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 인근에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소 등을 조기에 건설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력을 수요자가 직접 거래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도 내놨다.
중장기적으로는 원전과 재생에너지의 조합도 과제다. 유 전 교수는 2030년 원전 발전 비중을 30~40% 수준으로 유지하고, 2050년에는 재생에너지 비중을 50~70%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는 확정된 정부 목표가 아닌 전문가 제언이다.
SMR은 중장기 전력 공급원으로 기대되지만 단기 수요에 대응하기는 어렵다. 김 교수는 SMR이 AI 데이터센터 전력 공급의 실질적인 대안으로 본격화하는 시점을 2035~2036년 이후로 내다봤다. 당장은 기존 전원과 전력망을 최대한 활용하고, 중장기적으로 원전·재생에너지·저장 설비를 조합해야 한다는 의미다.
SK의 웨스팅하우스 투자는 AI 인프라 경쟁의 무게중심이 반도체와 데이터센터에서 안정적인 전력 확보로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지분 투자가 곧바로 전력 공급이나 기술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투자 성패는 원전 사업 참여와 기술 활용 권리를 확보하고, 이를 실제 전력 조달과 연결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