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IT열전]④이해진과 네이버…포털시대의 개막

IT/과학

이데일리,

2026년 October 24일, AM 12:01

혁신이 필요한 시대, 이데일리는 한국 벤처·스타트업 업계를 이끌었던 인물들을 조망하는 열전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우리 시대의 창업 꿈나무들에게 교훈을 줄 수 있는 인물들이 대상입니다. 일부 논쟁적인 인물이라도 벤처·스타트업의 도전과 성공이라는 관점에서 그들의 삶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이데일리 김유성 기자] 전 세계 검색 시장을 장악한 구글도 고전을 면치 못한 곳이 있다. 러시아와 중국을 제외하면 한국이 대표적이다. 한글이 일종의 장벽이 돼준 측면도 있지만, 그 안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남은 네이버의 공도 무시할 수 없다. 2000년대 초 PC·인터넷 시대부터 2010년대 모바일 시대까지 네이버는 한국 인터넷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자랑했다.

그러나 네이버 역시 처음에는 야후와 다음에 밀렸던 후발주자였다. 검색엔진 기술로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이용자를 모으는 데 애를 먹었다. 회사 운영에 필요한 돈을 걱정하며 매각을 고려했을 정도다.

어쩌면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라는 문구는 네이버 창업자 이해진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위기 때마다 추진했던 합병과 서비스 출시는 묘수가 됐고, 네이버의 경쟁력이 됐다. 구글 등 미국 IT기업들의 국내 시장 진출이 활발해졌던 2010년대부터는 해외로 눈을 돌리기도 했다.

그의 궤적을 거슬러 올라가면 여러 사람을 만난다. 86학번 공대생들이다. 넥슨 창업자였던 김정주, 한국 게임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송재경 등이다. 이들은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86학번 동기였다. KAIST 대학원에서도 이들의 인연은 이어졌다. 이해진과 김정주는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썼고, 옆방에는 송재경과 넥슨 초기 개발진으로 활동했던 김상범이 있었다.

이들의 인연은 한국 산업화의 주역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인연을 떠올리게 한다. 우연하게도 삼성 창업주 이병철과 LG 창업주 구인회는 진주의 지수보통학교에서 함께 공부했다. 영웅이 시대를 만들기도 하지만, 시대가 영웅을 낳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AI 생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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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의 친구들, 창업의 동료와 경쟁자가 되다

동기들이 기억하는 이해진은 조용한 학생이었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동기였던 한 기업인의 얘기를 들어보면 ‘합리적이고 온화한 학생’이었다. 전국 대학 컴퓨터 서클 연합인 유니코사에서 그를 알았던 사람들도 ‘부끄러움 많이 타는 친구’로 기억했다.

다음 창업자 이재웅과도 일찍 인연을 맺었다. 당시 한국경제 기자였던 임원기가 2008년 공개한 취재 기록에 따르면, 두 사람은 서울 청담동 진흥아파트 위아래층에 살았다. 두 집 부모님이 같은 연배에 비슷한 전공을 공부하는 아들들을 서로 소개하면서 두 사람도 가까워졌다. 두 사람이 훗날 포털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게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묘한 인연’이다.

KAIST에서 전산학 석사 학위를 받은 이해진은 1992년 삼성SDS에 입사했다. 회사 내 검색엔진 개발에 참여했고, 1997년 사내벤처를 이끌었다. 네이버의 전신인 웹글라이더의 시작이었다. 인터넷이 한국에 막 소개되던 시점에 필요한 서비스였다.

이후 네이버라는 이름이 붙었다. 서비스의 지향점도 이름에 담겼다. ‘항해하다’를 뜻하는 영어 ‘내비게이트’에 사람을 나타내는 접미사 ‘-er’가 붙었다. 정보의 바다에서 이용자가 원하는 정보를 찾도록 돕는 안내자라는 의미다.

네이버뿐일까. 당시 등장한 검색엔진 서비스 중에는 이름에 ‘인터넷이라는 광활한 공간에서 정보를 찾아준다’는 의미를 담은 것들이 있었다. 검색엔진 기술에서 네이버와 경쟁했던 엠파스(empas)에는 나침반(compass)의 의미가 담겨 있다. 한글과컴퓨터가 1996년 개발했던 ‘심마니’는 한국에서 산삼을 캐러 다니는 사람을 뜻한다.

초기 네이버는 다른 웹사이트에 검색 기술을 제공하며 기반을 쌓았다. 이 중에는 이재웅이 창업한 다음의 한메일넷도 있었다. 메일과 커뮤니티 등 비슷한 서비스를 놓고 경쟁하기 전까지 두 회사는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는 관계였다.

◇검색 기술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어

1999년 6월 이해진과 동료들은 삼성SDS에서 나와 네이버컴을 출범시켰다. 이해진과 동료들이 마련한 3억5000만원에 삼성SDS 투자금 1억5000만원을 보탰다. 자본금 5억원으로 시작한 네이버는 검색 기술에 회사의 생존을 걸어야 했다.

당시 시장은 이해진과 네이버에 만만하지 않았다. 우선 야후가 국내 인터넷 시장에서 강력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다음과 라이코스도 이용자를 끌어모았다. 검색 품질이 좋다는 평가를 받아도 이용자의 습관을 바꾸기는 어려웠다. 다음 메일을 쓰고 다른 포털에서 뉴스를 읽는 사람들에게 네이버를 찾을 이유를 만들어줘야 했다.

그즈음 광고도 기대만큼 효과를 내지 못했다. 네이버는 홍보 광고에만 50억원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해진의 자녀들조차 경쟁사 라이코스의 광고 문구를 기억했다고 한다. 라이코스라는 검은색 개가 당시 최고 스타였던 엄정화를 데려오는 광고였다. 검색 기술을 만드는 일과 이를 사업으로 키워 돈을 버는 일 사이에는 간극이 있었다.

2000년 네이버는 무료 인터넷 전화로 주목받던 새롬기술과 합병을 추진했다. 합병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김범수가 이끌던 한게임과 손을 잡았다. 인터넷 검색과 온라인게임이라는 서로 다른 서비스를 결합하는 선택이었다.

사실 이해진과 김범수는 1992년 삼성SDS 입사 동기였다. 각자 창업한 뒤에도 사업에 관해 의견을 나누던 사이였다. 네이버는 이용자 기반과 수익 모델을 확충해야 했다. 한게임은 빠르게 늘어나는 이용자를 감당할 시스템과 사업 기반이 필요했다. 두 회사의 고민이 맞물리면서 2000년 7월 결합했다. 회사 이름은 NHN으로 바뀌었다. 네이버와 한게임을 연상시키는 이름이긴 하나, 공식적으로는 ‘넥스트 휴먼 네트워크(Next Human Network)’의 약자였다.

합병이 곧바로 생존을 보장한 것은 아니었다. 2000년 말에는 신규 투자를 받지 못하면 곧 현금이 바닥날 상황이었다. 돌파구는 한게임의 유료화였다. 2001년 3월 유료화 첫날 이용자들이 낸 돈은 1억원에 달했다.

한게임의 성공적인 유료화는 네이버가 검색 기술에 투자할 시간을 벌어줬다. 게임이라는 서비스의 특수성도 있었지만, 당시 대부분의 인터넷 서비스가 유료화를 시도하다가 실패했던 것과 비교하면 행운이기도 했다.

◇검색할 정보가 부족하면 이용자가 만들게 하라

네이버가 풀어야 할 문제는 검색 속도만이 아니었다. 한국어로 된 웹문서가 충분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뛰어난 검색엔진도 찾아줄 정보 자체가 부족하면 이용자를 만족시키기 어려웠다.

2000년 도입한 통합검색은 여러 종류의 정보를 한 화면에서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웹문서와 이미지 등 성격이 다른 자료를 검색 결과에 함께 배치했다. 이용자가 원하는 답을 찾기 위해 검색 종류를 바꿔가며 돌아다니는 수고를 덜어준다는 취지였다.

2002년 10월 7일 시작한 지식iN은 한발 더 나갔다. 이용자가 질문하면 다른 이용자가 답을 해주는 방식이었다. 누군가의 경험과 지식이 검색 정보로 바뀌었다. 질문과 답변은 쌓였고, 비슷한 궁금증을 가진 다음 사람의 검색 결과가 됐다.

2003년에는 블로그와 카페로 영역을 넓혔다. 네이버 검색 안에서만 볼 수 있는 한국어 정보의 양이 늘었다. 이렇게 쌓인 정보는 네이버의 검색 기술과 결합하면서 타사 대비 강력한 경쟁력이 됐다.

지식iN에는 질문과 답변이, 블로그에는 개인의 기록과 경험이, 카페에는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의 정보가 쌓였다. 사용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해 ‘정보 생태계’를 이루고, ‘검색’이 그 사이를 연결해준다는 점에서 독보적이었다.

물론 이후 ‘가두리 생태계’라는 비판을 받게 되지만, 당시에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뉴스가 사람을 모으고, 검색이 광고를 불렀다

뉴스 서비스도 네이버에 중요한 기회였다. 언론사가 생산한 기사를 포털에서 한꺼번에 볼 수 있게 하는 방식이었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여러 언론사의 홈페이지를 일일이 찾아가지 않아도 됐다. 포털의 첫 화면은 정보 소비의 출발점으로서 의미가 커졌다. 네이버는 한국 뉴스 유통의 주요 통로가 됐다.

네이버는 2003년 9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그해 8월 코리안클릭과 메트릭스의 검색 방문자·검색 페이지뷰 집계에서 모두 1위를 기록했다. 검색 분야에서 선두에 오른 것이다.

검색 분야의 성장은 광고 매출 증대로 이어졌다. 네이버는 2001년 검색광고 상품을 도입했는데, 이용자가 많아지면서 광고주들도 검색 결과에 주목했다. 광고 수익은 서비스와 기술에 투자할 여력을 키웠다. 한게임 수익으로 버티던 회사에서 검색 자체가 주력 수익원이 되는 회사로 무게중심이 이동했다.

2004년 1월 이해진은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났다. 김범수가 단독 CEO를 맡고, 이해진은 이사회 의장 겸 최고전략책임자(CSO)로 역할을 바꿨다. 2005년에는 최휘영이 국내사업 대표를 맡아 검색과 포털 사업의 성장을 이끌었다.

검색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투자도 이어졌다. NHN은 2006년 6월 검색 전문기업 첫눈을 인수했다. 해외 검색 시장 진출과 우수 개발 인력 확보가 목적이었다.

2008년 5월 코리안클릭의 검색 질의량 기준 점유율 집계에서 네이버는 70.5%, 다음은 17.5%, 구글은 2.5%였다. 야후와 다음의 뒤를 쫓던 후발주자가 국내 시장에서만큼은 글로벌 검색기업도 넘보기 어려운 자리를 차지했다.

다만 방문자 수를 놓고는 다음과 혈전을 치렀다. 2005년 2월 월간 순방문자 집계(코리안클릭)에서 네이버는 2564만명, 다음은 2561만명으로 박빙의 차이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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