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챗GPT.)
당시 CAR-T(키메라항원수용체 T세포) 치료제의 소아 백혈병 환자 임상을 준비하던 그루프 박사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에밀리를 첫 번째 환자로 등록하고 CAR-T를 투여했다. 죽음을 눈앞에 뒀던 에밀리는 10년 넘게 암 재발 없이 건강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CAR-T가 기적의 항암제로 떠오른 순간이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CAR-T의 치명적 단점이 드러났다. 고형암 환자를 대상으로 한 일부 임상 실험 중 환자가 사망하는 사례가 연이어 발생하기 시작했다. CAR-T는 환자의 면역세포를 꺼내 암세포를 잘 공격하도록 개조한 뒤 다시 환자 몸에 넣는 항암치료제인데, 정상 세포까지 공격하며 이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재발·독성 극복하겠다”…이중사슬에 승부 건 이유
“CAR-T는 기적의 항암제였다. 혈액암을 완치시킨 항암제다. 그런데 오래 투여하면 40% 가까이 재발하고, 고형암에서는 즉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문제는 재발률과 독성이었다.”
진양곤 HLB그룹 회장은 최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2026 HLB Group IR Day’에서 차세대 항암제인 CAR-T의 가능성을 언급하면서도 이 같은 문제점을 지적했다. 진 회장은 “기존 CAR-T는 암세포가 죽으면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계속 싸운다”며 “나중에 암이 생겼을 때는 탈진해서 싸우지 못하는 것이 기존 치료제의 한계”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진 회장은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CAR-T 항암 치료제가 향후 HLB그룹이 개발 중인 여러 파이프라인 중에서도 가장 성장 잠재력이 높은 후보 물질로 평가했다. 진 회장은 “현재 파이프라인을 전반적으로 평가해보면 만약에 CAR-T의 임상 성과가 조금 더 나온다면 간암과 담관암 신약을 허가받은 것보다 기업가치가 더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HLB(028300)가 CAR-T에 거는 기대가 큰 이유는 기존 치료제의 한계를 극복할 경우 고형암을 비롯한 다양한 암종으로 치료 영역을 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정 암종을 치료하는 개별 신약과 달리 CAR-T 플랫폼은 암세포를 인식하는 표적을 변경해 여러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다.
HLB는 현재 계열사 HLB이노베이션(024850)의 미국 자회사 베리스모테라퓨틱스를 통해 CAR-T 플랫폼인 ‘KIR-CAR’를 개발하고 있다. 베리스모는 세계 최초의 CAR-T 치료제 ‘킴리아’ 개발에 참여한 펜실베이니아대 연구진의 기술을 기반으로 설립됐다. 2021년부터 베리스모 지분을 취득하기 시작한 HLB는 2024년 베리스모를 HLB이노베이션의 완전 자회사로 편입시켰다. 이후 2025년에는 베리스모의 임상개발 및 운영자금을 목적으로 300억원이 넘는 금액을 출자했으며, 올해 4월에는 총 414억원 규모의 추가 출자를 결정하기도 했다.
KIR-CAR가 기존 CAR-T 치료제와 가장 차별되는 부분은 바로 다중사슬 구조다. 기존 CAR-T 치료제는 암세포를 인식하는 수용체와 T세포를 활성화하는 신호전달 기능이 하나의 사슬에 결합돼 있다. 반면 KIR-CAR는 암세포를 인식하는 부분과 활성화 신호를 전달하는 부분이 분리돼 있다. 이 방법을 통해 암세포를 만났을 때만 두 사슬이 연결되면서 공격을 수행하고, 암세포가 없을 때는 공격을 멈추는 구조를 만들었다. 기존 CAR-T 치료제의 문제점이었던 T세포의 탈진과 일반 세포에 대한 무작위 공격을 극복한다는 전략이다.
진 회장은 “베리스모 연구진들은 기존 CAR-T 치료제의 어려움과 한계를 알고 있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찾아낸 것이 이중사슬”이라며 “싸울 때만 싸우고 쉴 때는 쉰다. 재발해도 다시 싸울 수 있고 독성은 낮출 수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형암·혈액암 동시 공략…상용화까지 해결해야 할 문제 많아
베리스모가 개발 중인 핵심 파이프라인은 고형암 치료제 ‘SynKIR-110’과 혈액암 치료제 ‘SynKIR-310’이다. 두 치료제 모두 KIR-CAR 플랫폼이 적용된 후보 물질이다.
SynKIR-110은 암세포 표면에 발현되는 메소텔린(MSLN)을 표적으로 한다. 난소암과 악성 중피종, 담관암 환자를 대상으로 미국에서 임상 1상을 진행하고 있다. 메소텔린은 여러 고형암에서 발현되는 단백질로, 이를 인식한 CAR-T가 암세포를 공격하도록 설계됐다.
베리스모가 지난 4월 미국암연구학회(AACR)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SynKIR-110을 투여받은 환자 9명 중 4명에게서 종양 크기 감소가 관찰됐다. 최대 감소 폭은 47%였으며, 이 가운데 1명은 6개월 추적 관찰 시점까지 부분반응을 유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CD19를 표적으로 하는 혈액암 치료제인 SynKIR-310은 기존 CAR-T 치료 후 재발하거나 치료에 반응하지 않는 환자 등을 대상으로 임상 1상을 진행하고 있다.
물론 HLB의 이중사슬이 완전히 새로운 접근은 아니다. 이미 2010년대 초반부터 두 수용체를 활용해 항원 인식과 활성화 신호를 분리하려는 연구들이 진행돼 왔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중사슬 CAR-T 구조가 기존 치료제보다 실효성이 높다는 게 입증되지는 않았다.
업계에서는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도 만만치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형암은 암세포마다 표적 항원의 발현이 다르고, 면역세포가 종양 내부로 침투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암세포마다 표적 항원의 발현 정도가 다르고, 정상 조직에 존재하는 표적을 공격할 위험도 있다”며 “치료 효능을 확보하면서도 과연 부작용을 제어할 수 있는지가 상용화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