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염식으로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사진=게티이미지)
창고는 조선시대 주요 시설로 꼽힌다. 잉여생산물은 권력의 것이었고, 이를 잘 다루는 것은 권력을 유지하는 것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창고가 있던 자리가 지명으로 남아 이어진 곳은 비단 염창동뿐이 아니다.
마포구 창전동(倉前洞)도 창고를 끼고 생겨난 마을이다. 단순히 창고 앞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인데, 이 동네 창고는 광흥창을 일컫는다. 고려와 조선시대 관리는 녹봉을 주로 양곡으로 지급받았다. 이들에게 줄 곡식을 쌓고 지출을 관리하는 데가 바로 광흥창이다. 고려와 조선의 관료제를 지탱해오던 광흥창은 현재는 헐리고 터를 알리는 표석만 남았다. 지하철 6호선 광흥창역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선혜청 터 표지석.(사진=남대문시장)
지금의 용산구 효창동에 있던 만리창은 선혜청의 별창(別倉)이었다. 이곳에 창고를 새로 지었다고 해서 신창(新倉)이라고 불렀다. 용산구 신창동은 이렇게 이름이 생겼다. 선혜청은 지금으로 치면 중구 남대문 시장에 있었는데, 여기를 기준으로 북쪽과 남쪽에 창고를 뒀다. 중구 북창동(北倉洞)과 남창동(南倉洞) 지명의 유래다. 선혜청의 가장 큰 창고 평창(平倉)은 종로구 평창동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원래 남대문 일대는 선혜청이 있어서 그냥 창동(倉洞)으로 불렸는데 정작 창동은 도봉구에 남아 있다. 창동도 조선 시대 양곡 창고가 있던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