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괴롭힌다면 '공자'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역사&오늘]

해외

뉴스1,

2024년 5월 09일, 오전 06:00

흥선대원군 이하응 사진(출처: Hulbert, Homer B., 흑백사진(1906),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1871년 5월 9일,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서원철폐령을 내렸다. 전국에 서원 중 47개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폐쇄하도록 한 조치였다. 철폐된 서원의 토지는 국가에 귀속됐고, 건물은 대부분 헐려 교육기관이나 군사 시설로 활용됐다.

조선시대 서원은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닌, 유교적 가치관을 전파하고 지역사회를 통합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서원은 붕당을 이뤄 당쟁의 근거지로 작용하고, 사사로운 목적으로 악용됐다. 또한 과도한 토지 소유, 권력 남용, 군정 회피, 탈세 등에 이용되며 비판의 대상이 됐다.

흥선대원군은 1864년 집권한 후부터 조선 후기 사회의 여러 문제점을 개혁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서원의 횡포와 비리는 당시 사회의 심각한 문제 중 하나였다. 그는 수백여 개의 서원을 없애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고 동시에 왕권 강화를 위해 서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지방의 유림 세력도 제압하려 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보내 도운 명나라 황제(신종)를 제향하는 만동묘부터 없앴다. 또한 우암 송시열의 위패를 모신 충북 괴산의 화양서원도 이때 철폐됐다. 반발하는 유생들에 대해 "백성들에 해를 끼친다면 공자가 살아 돌아와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일갈한 일화는 유명하다.

양반들은 유교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우려하며 결사적으로 반대하며 했다. 하지만 서원 철폐는 강행됐고, 서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사회는 와해됐다. 동시에 서원의 부실과 권력 남용을 개선하고, 사회 변화에 맞는 새로운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는 계기가 됐다.

서원철폐령은 조선 후기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책은 전통적인 유교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대에 맞는 변화를 위한 노력이기도 했다. 서원철폐령은 단순히 과거의 유물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 사회가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의 일부였다.

acenes@news1.kr